이공이사 그리고 이공이오
"오랜 기다림 속, 오래된 계획"을 발견한 2024년이었다. 그간의 내 모든 삶이 반추되는 연속적인 실존을 감각하는 한편, 섬광처럼 단번에 납득되는 결정적 순간을 알아채버린 그런 날들.
1월 첫 번째 근무일부터 도시락을 싸 다녔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밥을 짓고, 그날 저녁에 먹고 남은 것을 다음 날을 위해 소분하는 시간은 따뜻했다. 한낮의 분투하던 시간을 위로하는 구수한 온기. 나만의 공간이, 그 안에서의 작은 몸짓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다시 느꼈다.
몇 개의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마무리하니 한 해가 저물어 있었다. 즐거웠나? 글쎄, 잘 모르겠다. 일에서 어떤 경험이 쌓일수록 즐거움보다는 더 잘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커지는 것 같다. 이제 내게 무거워져버린 책임감을 상쇄하는 일의 기쁨과 즐거움은 무엇일까. 믿고 따를만한 사수나 선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짙어진 한 해였다.
봄과 함께 시작된 연애. 결혼이라는 결정. 그와 함께 하는 날들이 나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있다. 완전히 분리된 타인이자 또 완벽한 나 자신. 시간이 지날수록 외연이 확장되고 내면이 충만해지는 경험. 한 사람이 오는 건 실로 그런 일이구나. 나만 아는 온몸의 떨림을 타고 막연한 두려움이나 어렴풋한 기대감이 찾아왔다. 그럴 때마다 기도가 절로 나왔다.
섬진강의 해사한 벚꽃, 구례 화엄사의 홍매화와 통영의 아침, 거제 바다의 윤슬, 한겨울의 북해도를 두 눈으로 담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잊지 못할 서른일곱 번째 생일, 그리고 프로포즈. 그 사람이라서, 그 사람과 나- 둘이라서 좋은 것들을 배운다. 함께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할 것들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겐 과분히 선물 같은 시간들. 뜻 모를 미안함과 넘치는 감사함이 남았다.
몇 주 동안은 얀 마텔의 <Life Of Pi> 원서를 읽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친구와 줌으로 만났는데, 내가 책을 읽으면 친구가 발음을 교정해 주거나 혹 해석하기 난감한 부분을 정리해주는 식이었다. 한 시간 정도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친구가 짧은 Devotion을 읽으며 마무리했다. 책의 1/4 정도를 남겨둔 막판 즈음에는 둘 다 너무 바빠져서, 애석하게도 파이가 아직 태평양 한가운데에 있다. 조금만 기다려주겠니, 금방 육지로 안내할게!
또 몇 주 동안은 달리기를 했다. 해가 긴 어느 날 저녁, 그냥 뛰기 시작했다. 전날 뛴 게 아까워서 다음날도 뛰었다. 처음 며칠은 뛰다가 걷기를 반복했다. 다음 몇 날은 뛰기만 할 수 있게 됐다. 거의 매일 2개월을 달렸다. 뛰기를 마치고 나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딴딴하고 가벼워진 몸을 이끌고 산스장으로 곧장 달려가 스트레칭을 했다. 체중이 줄었다. 달리기를 멈췄지만 원래의 몸무게로 돌아가진 않았다.
친구와 함께 본 평창의 눈 덮인 발왕산, 고성-강릉-정동진을 잇는 가족 여행, 드레스와 수트 입고 환하게 웃었던 한여름의 웨딩 촬영, 보드게임으로 지새운 늦가을 원주의 밤, 엄마와 단둘이 떠난 서쪽 바다, 눈 나리던 춘천의 오월학교, 불 꺼진 에버랜드와 스타필드, 덕수궁 안 미술관에서 보았던 기개 높은 자수 작품들과 션 베이커의 <아노라>,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괴물>, 선우정아의 단독 콘서트, 새로운 집을 위한 그림 구매의 순간, 소중한 사람들의 결혼,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 둘셋이 도란도란 걸어 다녔던 수많은 골목길, 고정 방문하게 된 몇 개의 카페, 금요일의 새벽 예배, 홀로 올랐던 동네 뒷산- 모든 것이 고마운 장면으로 기억된다.
유독 분주하고 달뜬 한 해를 보내다 연말과 새해를 지나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하루를 정리하고 돌아보는 나만의 시간- 바쁘다는 핑계로 눌러 놓았던 온갖 상념들, 홀로 있을 때 더 쉽게 가라앉는 마음들. 거부할 수 없는 인간에 대한 환멸, 설명할 길 없는 깊은 슬픔, 한없이 나약하고 불안한 나 자신 따위를 있는 그대로 마주한다.
그러나 마침내는 이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강한 염원. 기왕에 주어진 삶을 이렇게 끝낼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보다 더 진지하게 문제에 직면하고, 성실하게 고민하며, 간절하게 기도하자. 그리고 사랑을 배우자.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시는 분으로 과연 낙관할 수 있기에. (2025.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