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문학을 찾게 되는 순간
좋은 문학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일상이라는 거대한 불안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너덜너덜하게 찢기고 부숴져도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는 안식처가 필요하다. 잠깐만이라도 눈과 귀를 편히 식힐 수 있는 그런 곳. 빠르게 허기를 달랠 수 있는 패스트 푸드처럼 우리는 많은 선택지와 마주하게 된다. 하루종일 자기, 먹기, 친구 만나기, 문화 생활하기. 짧은 시간이나마 불안의 세계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는 패스트 힐링. 나의 안식처는 문학이다.
대학 입시생 시절 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너는 이게 재밌어? 사실 그 질문은 내가 한국 문학을 읽으며 스스로 묻곤 했던 질문 중 하나였다. 꽤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질문이었지만 나는 친구에게, 나 스스로에게 해줄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다. 재밌을 리가 없었다. 세상에 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데, 이게 재밌으면 나머지 것들은 재밌다는 말로 표현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문학과 접촉할 일이 대부분 사라지고 만다. 또한 교과서에서 접했던 문학 작품들은 권선징악이라는 명백한 주제의식의 소설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황순원 작가의「소나기」나 현진건 작가의「운수 좋은 날」같은 작품들이다. 교훈적 문학작품에 익숙한 상태에서, 확실히 그때의 나에게 좋은 문학이란 기승전결이 뚜렷한 소설과 미학적인 시였다.
좋다는 것. ‘보통 이상 수준이어서 만족하다.’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이자 감상이다. 유명한 문학 작품들에서 보통 이상의 수준을 느낀다고 하여도 만족이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 시절 나 또한 그랬다. 좋다고 생각하면 좋아질 것도 같았다. 남들이 좋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음에도 좋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이제와서 고백해보자면 그때 읽었던 시집의 절반 이상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문학을 찾지 않게 되는 순간이 여럿 있었다. 억지로 작품을 이해해보려고 애쓸 때, 문학은 스트레스가 되어 돌아왔다. 그럼에도 문학을 찾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김애란 작가의「너의 여름은 어떠니」와 윤이형 작가의「루카」이다.
고전 문학과 근대 문학에 익숙해져 있는 시야를 확장시켜준 작품은 김애란 작가의「너의 여름은 어떠니」라는 단편 소설이었다. 김애란 작가의 단편 소설집「비행운」에 가장 첫번째로 실린「너의 여름은 어떠니」는 충격적인 사건이나 강렬한 이미지가 없는 다소 잔잔한 서사의 소설이다. 제목에서부터 작가는 넌지시 물어온다. 너의 여름은 어땠니?
사건은 고향 친구의 부고가 들려온 날, 대학 시절 짝사랑하던 선배로부터 연락이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늘씬한 대식가와의 먹기 대결에 출연해달라는 것이었다. 몸매에 콤플렉스가 있는 ‘나’는 완곡히 거절하지만 결국 스튜디오에 서게 된다. 이 소설에서 주목할 부분은 ‘선배’의 인물 변화와 고향 친구 ‘병만’의 존재 의식이다. ‘고개 좀 들고 다녀라, 이 녀석아.’ 선배는 ‘나’의 부재를 알아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 선배의 앞에서 몸에 달라붙은 옷을 입고 게걸스럽게 핫도그를 먹어치워야하는 치욕스러운 일을,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빨리 끝내려 한다. 자꾸만 움츠러드는 ‘나’에게 선배는 그때처럼 ‘고개 좀 들어, 미영아. 고개 좀 들어, 제발’ 이라고 외친다. 급히 방송국을 빠져 나가는 ‘나’의 팔뚝을 세게 잡은 선배는 고맙다며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한다. 선배의 연락에 샘솟던 설레고 좋았던 기억이 산산조각 나며 ‘나’는 결국 고향 친구 병만의 장례식에 가지 못한다. 자취방에 돌아온 ‘나’는 불현듯 물놀이를 하다가 익사할 뻔 했던 유년시절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손에 걸리는 거라곤 쥐자마자 부서지는 강물이 전부였던 그 순간에, 병만이 ‘나’의 손을 잡은 것이다. 그가 아플 거라는 걸 알았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병만의 팔뚝을 더욱 세게 움켜쥔다. 조용히 가라 앉고 있던 ‘나’를 잡아채준 그 팔뚝. 좁은 자취방에서 가장 강렬했던 여름의 기억을 되살리며 살면서 내가 가장 세게 잡은 누군가의 팔뚝을,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아는, 혹은 모르는 누군가가 나 때문에 많이 아팠을 거라는 느낌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림을 느낀다.
이렇게 김애란 작가는 일상에서 일어남직한 사건을 잔인할 정도로 소설 속에 녹여낸다.「너의 여름은 어떠니」는 현실과 거리가 멀고, 특별성을 띈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소설의 고정관념을 깨부숴주었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일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 정도로 큰 영향을 주고, 그때는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김애란 작가의 소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법한 이야기도 소설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내내 동경해왔던 인물의 이면을 발견하고 기억 한 구석에 밀어놓았던 인물의 면모를 깨닫는 일. 좋은 문학이란, 어쩌면 다른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나’를 마주하게 해주는 매개체가 아닐까.
두 번째로 윤이형 작가의「루카」이다. 2014년 제 14회 황순원 문학상, 2015년 제 6회 젊은 작가상, 2015년 제 5회 문지문학상을 수상한 윤이형의「루카」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좋은 문학 작품으로 자리잡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루카」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문학을 읽는 독자로서, 문학을 창작하는 작가로서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과거 연인 루카의 아버지가 ‘나’를 찾아오면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그간 윤이형 작가가 써온 「대니」,「윈 캠프 루비」와 같은 SF 소재의 작품들과는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퀴어 영화 모임에서 만난 ‘나’와 루카는 성소수자이다. 스스로 ‘커밍아웃’을 해 성 정체성을 밝힌 나와 달리 루카는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밝혀지게 되는 ‘아웃팅’을 당한다. 작가는 이 지점부터 ‘나’와 루카의 차이를 드러낸다. 또한 ‘나’는 퀴어 관련 활동을 통해 정체성을 찾아가지만 루카는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취미 생활도 미뤄둔 채 학원 강사 일을 늘리게 된다. 둘만의 공간에서 함께 하기를 바랐던 ‘나’는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했던 루카를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그들은 ‘서로 다름’을 극복하지 못해 헤어지게 된다.
이 서사에서 동성애라는 키워드를 빼낸다면「루카」는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실패한 사랑 이야기처럼 보인다. 작가는 그 지점을 꿰뚫은 것이다. 많은 동성애 텍스트가 다루고 있는 사회적 폭력이 아닌, 그들도 흔한 연인들처럼 사소한 오해가 불거져 헤어진다는 것. 이해관계에 있어서 서로를 소수자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또한 동성애 서사에서 빠질 수 없는 그들의 가족 이야기. 루카의 아버지다. 루카의 아버지는 타지를 헤맸던 자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털어놓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줄 사람 하나 없는 곳을 묵묵히 걷기만 했던 루카가 실은 죽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만다.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는 기독교 사회에서 잘못된 믿음으로 자신의 아들을 잃었다는 때늦은 후회. ‘나’에게 찾아와 루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애원하지만 ‘나’는 그마저 들어주지 않는다. ‘나’ 또한 믿음의 관계에 루카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루카에게 가장 가깝고도 멀었던 두 사람은 자신의 시선에 갇혀 루카를 잃고 만다.
나는 이제 너와 함께가 아니고 여전히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은 채 살아간다. 어떤 일들은 그저 어쩔 수 없고 어떤 일들은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으며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 그저, 그럴 수 없다. 삶이라는 이름의 그 완고한 종교가 주는 믿음 외에 내가 다른 무언가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내 믿음을 지켰고 너를 잃었다. 그 사실이 가끔 나를 찌르지만 나는 대체로 평안하다. 그런데, 루카, 너는 어떠니. 너는 그곳에서 평안하니. 루카였고 예성이었던 너는.
소설의 마지막 문단은 ‘나’의 체념적 어조로 쓰여진 문장이 나열된다.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들과는 그럴 수 없다는 현실적 아픔. 작가는 동성애 서사에서 다뤄야할 지점까지 놓치지 않고 끌어내고 있다.
편견없이 나와 다른 사람을 바라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문학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작가의 시선은 어떤 이들을 가두고, 또 해방 시키기도 한다. 좋은 문학은 내면에 자리잡힌 관념을 건드려 균열을 생성한다. 윤이형 작가의「루카」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창작자로서 가지는 시선의 폭력성을 환기 시키는 좋은 문학 작품이다.
2. 좋은 문학에 대해서
세 가지의 하위 목록은 문학을 배우기 이전의 내가 품었던 오해들이다. 좋은 문학이 가져야 할 필수 요소라고 생각했던 세 가지의 하위 목록을 재해석하는 식으로 구성해보았다.
① 좋은 문학은 아름다워야 한다.
몇몇의 사람들은 문학을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대중적으로 비춰지는 미학적인 시의 영향때문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을 예시로 들 수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구절에서 우리는 충분히 시적 표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사람들에게 황병승 시인의「여장남자 시코쿠」를 읽어보라고 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말할까?
좋고 나쁨의 사회적 객관성처럼 ‘아름다움’은 나름대로의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학의 세계에서 ‘아름다움’은 천차만별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어떤 이는 상상의 확장판이라고 여겨지는 문학 작품에서 아름다움의 희열을 느끼고, 또 어떤 이는 인간에 대한 고발적인 서사를 다룬 문학 작품에서 기이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현대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작 알고 있었을 사실이다. 아름다운 단어의 나열로 이루어진 작품은 사전적 의미 외에 어느 것도 포괄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을 것이다. 문학이 마냥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문학의 기괴한 단면을 발견했을 때 느껴지는 괴리감. 그 속에서도 아름다움은 분명 존재한다. 미학적 아름다움이 아닌 생애 느껴보지 못한 아름다움의 여러 갈래를 우리는 문학 속에서 찾을 수 있다.
② 좋은 문학은 어려워야 한다.
문학은 삶의 틈을 예리하게 표현해내는 예술 작품이다. 우리의 삶이 쉽게 설명되지 않는 것처럼 문학도 그렇다. 답이 쉽게 도출되지 않는 문제를 보고 우리는 ‘어렵다’고 표현한다. 현실의 문제만으로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문학 속 사건들까지 나를 괴롭히는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문학이 어렵다는 생각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문학은 삶을 보관하는 ‘원더박스’이자 사위가 ‘밝아지기 전에’ 빛을 제공하는 촛불이기도 하다. 삶의 실상을, 일상의 부조리를, 관계의 뒤틀림을, 상상의 실마리를 낱낱이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좋은 문학의 조건이다.
먼저, 편혜영 작가의「원더박스」를 보자. ‘원더박스’란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진기하고 매혹적인 수집품들로 채운 장식장이나 전시실을 가리킨다. 줄거리는 이렇다. 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친 수만과 그런 수만을 간호하는 소영. 문제는 그 사고를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지만 피해자는 존재하는 상황. 작가는 명확히 찾을 수 없는 잘못의 형상을 원더박스라는 제목을 도구로 활용해 더욱 예리하게 포착하고자 했다. 김이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고 했다. 몸이 멀쩡했다면 잠적한 김을 직접 찾아다녔을 거라고 했다. 어떤 식으로든 보상과 사과를 받아내야겠다고 했다. 수만이 끝도 없이 탓을 해왔던 김. 오랜 도피 생활을 하던 김이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수만은 자책에 빠지기도 한다. 그간 퍼붓던 비난이 모두 진심이었다는 걸 소영은 안다. 소설이 마무리 되면서 작가는 이렇게 서술한다. ‘또 다시 알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인생에게 속아 넘어갔다는 느낌이었다. 소영은 이것이야말로 누구의 잘못인가 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자주 그런 상황과 부딪치곤 한다. 또 나의 잘못을 누군가의 탓으로 떠넘기고 싶어하기도 한다. 원망의 대상이 사라지고 난 후의 허망함. 어디에서부터 오는 지 모를 부채감.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악순환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는지 작가는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소설화 시켜 삶의 실상을 명백히 드러냈다.
두 번째로 한강 작가의「밝아지기 전에」를 보자. 소설의 전체적 키워드는 죽음이다.「밝아지기 전에」가 수록된 한강의 단편 소설집「노랑무늬 영원」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소설은 ‘나’와 ‘나’의 아들 윤이, 은이 언니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나’는 항암 치료를 끝내 생과 죽음의 경계에서 간신히 살아돌아온 인물이며, 윤이는 죽음과는 거리가 먼 생의 기운이 펄럭이는 인물이다. 동생의 죽음을 방치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은이 언니는 세계를 떠돌다 죽음의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인물이다. 인상적인 부분은 소설의 첫 머리라고 할 수 있다. 윤이와 산책을 하던 ‘나’는 풀숲 쪽에서 얼굴을 가슴 쪽으로 파묻고 죽어있는 흰 새를 발견한다. 윤이가 다가가 새를 만지려 하자 ‘나’는 그런 윤이를 제지한다. 만지면 안 되냐는 윤이의 질문에 ‘나’는 ‘죽었잖아.’ 라고 답한다. 죽었으면 만지면 안 돼? 윤이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나’는 그 길을 벗어난다. 또한 ‘나’는 은이 언니의 설득어린 질문과 고백에 냉정할 정도로 호의적이지 못한다. 고개를 젓고 외면한다. ‘나’는 죽음과 마주했었고, 죽음과 어떠한 연결고리도 두고 싶지 않은 ‘윤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은이 언니가 뎅기열로 죽게 되고 ‘나’는 은이 언니에 관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은이 언니에게 차마 해주지 못했던 말들, 삶에게 내던지는 말들을 서슴없이 털어놓는다.「밝아지기 전에」는 생과 죽음을 부채꼴로 형상화 했을 때 각자의 자리에서 대표할 수 있는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해 놓았다. 작가는 관계의 본능적인 민낯을 ‘나’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③ 좋은 문학은 고발해야 한다.
대게의 문학 작품이 고발적 특성을 띈 것은 사실이다. 긍정과 희망을 줄 수 있는 텍스트는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에도 우리가 따뜻하게 얻어갈 수 있는 희망적 요소가 존재한다. 아직 살아갈 수 있다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 이번 목차에서 소개할 작품은 김중혁 작가의「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이다.
전국 바닷가를 돌아다니며 지도의 오차를 발견하는 일을 하는 ‘나’는 모친상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캐나다에 살고 있는 삼촌으로부터 소포를 받게 된다. 다시 출발 지점으로 돌아가서 달리기를 시작하기엔 너무 지쳤고 너무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함께 달릴 만한 사람도 없다. 어머니는 이제 레이스를 마친 것이다. ‘나’는 어머니를 잃은 충격에 소포를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가 일주일 후 회사로 돌아와 소포를 뜯게 된다. 종이 상자 안에 든 것은 다름 아닌 나무 조각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어떤 예술가의 작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나무 조각의 촉감에서 어머니의 손등을 발견한다. ‘나’는 뒤늦게 나무 조각이 지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삼촌의 전화에 그것이 에스키모의 지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삼촌은 ‘나’에게 캐나다에 와서 함께 지도를 연구하며 지내자고 제안 하지만 ‘나’는 ‘제가 거기서 뭘 할 수 있겠어요?’ 라고 말한다. 삼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어떤 때는 공간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많은 게 바뀌는 법이란다. 네가 할 일은 거기에서 여기로 이동하는 것뿐이야.’ 라며 ‘나’를 설득하고 자신이 지내고 있는 툴레로 올 것을 권한다.
툴레는 세상의 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위치만 바꾸어 보아도 커다란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것. ‘나’가 자신이 현재 위치한 곳이 세상의 끝 같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쩌먼 모두가 세상의 끝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고 작가는 위로의 말을 던진다. 위태롭게 흔들리지만 언제나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지침과 같이, 지침을 붙드는 힘과 같이 무엇이 우리는 이토록 살아가게 만드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지침이 다른 방향을 가리킬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고 작가는 문학으로써 독자들을 위로한다.
이렇듯 우리가 위로 받는 순간은 단순하다. 괜찮아 질 거야, 걱정하지 마.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장식적인 말보다는 나와 같은 사람, 나처럼 살아왔고 그럼에도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에 우리는 작은 위로를 얻게 된다. 문학은 그러한 지점에서 가장 우수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현재 내가 있는 위치에서 느껴지는 좋은 문학을 여러 작품에 빗대어 토로해보았다. 소제목에 알맞은 단편을 추리는 과정에서 많은 단편들을 놓친 것 같아 마음이 쓰리다. 좋은 문학이란 추상적인 산물이며 정의하고 싶지 않은 개념 중 하나다. ‘좋은 문’학은 앞으로 창작자의 길을 걸음에 있어서 수도 없이 바뀔 것이고, 그 의미가 불분명해질 것이다. 그러길 바란다.
17년 1학기 중간 과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