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를 감상하고 남기지 않으면 휘발된다는 걸 절감한다. 여기 적지 못하고 이미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진 무언가들에 묵념을.
SNS에서 임인택 기자의 기사를 읽고 알게 된 인도네시아 작가 에카 쿠르니아완의 장편소설이다. 서문을 「상상의 공동체」의 저자 베네딕트 앤더슨이 썼는데, 이 책은 「Man Tiger」라는 이상한 영제로 서구권에 출간되었다고 한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란 표현을 쓴 추천사가 있던데, 다 읽고 나니 아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범죄소설이다. 어릴 적부터 호러나 무협, 로맨스 소설을 탐독했다는 작가의 말이 괜히 쓰인 건 아닌 듯하다.
어느 날, 마을의 큰 부자가 목을 물어뜯겨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범인은 마을의 성실한 청년 마르지오. 그는 왜 그토록 잔인한 짓을 한 것일까? 소설의 배경은 인도네시아가 네덜란드에서 독립해 아직 살기 힘든 시절. 그중에서도 아주 빈곤한 가정의 한 소년이 마르지오다. 한때는 선남선녀였지만 지금은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과 점점 정신이 바닥으로 침몰하는 어머니를 보며 점점 소년은 성장해 청년이 되고, 아버지에 대한 증오도 함께 커져만 간다. 그와중에 마을 부잣집 막내딸은 청년에게 마음을 품고, 청년도 싫지만은 않다. 점점 늪으로 빠져들지만 어찌할 수 없는 하루하루를 영위하던 청년의 몸속에 신비한 호랑이가 들어가버리는 사건이 발생하고, 청년은 호랑이에게 몸의 통제권을 빼앗길까봐 걱정한다.
주인공 마르지오뿐 아니라 부모의 변천사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능구렁이처럼 타고 들어와 결국 살인사건이라는 한 점으로 귀결되고, 소설의 시작과 끝도 이내 연결되어 수수께끼는 풀리고야 만다. 2016년 맨부커상 후보작이었다는 게 괜한 수식어는 아니다.
딱 「황혼에서 새벽까지」가 떠오르는 영화다. 하지만 영화 전반을 수놓는 음악이 훌륭해 보면서 이건 음악영화인가 하는 생각도. 적재적소에 심어 놓은 복선이 제 역할을 다해서 음악영화에서 호러영화로, 그리고 갱스터물로 급선회할 때 어색함이 없다. 배경이 1932년이라 흑인들이 차별당하는 장면은 직간접적으로 나오는데, 한국인 입장에서도 그 감정에 젖어들기가 어렵진 않을 듯하다. 많은 은유와 상징이 있는데, 그런 걸 차치하고 그냥 음악이 잘 나오는 뱀파이어 호러영화로 즐겨도 충분하다. 음향이 훌륭한 극장에서 보았으면 더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아사오 이니오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이야기는 이렇다. 도쿄 상공에 갑자기 등장한 거대한 UFO, 하지만 사람들은 그냥 살던 대로 살고 여고생 절친 카도데와 오란은 평범하게 대학에 진학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종말은 곧 다가올 것이고, 조금씩 일상에 균열은 생길 수밖에 없다.
몇 가지 눈에 밟히는 부분이 있다. 거대 UFO 안에는 일종의 원자로가 있는데, 어떻게 보면 도쿄 한복판에 원자력 발전소를 놓고 그게 붕괴하는 사고가 났을 때를 그린 셈이다. 물론 작중 일본 정부는 크고 작은 사건을 덮기 급급하고, 미국과 기싸움을 하며 그저 UFO라는 재난을 없애는 데만 집중한다. 그런가 하면 도쿄 시민들도 비정상인 상태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기고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카도데와 오란이 평범한 청춘을 구가하는 것 역시 기이하게 보일 정도다. 동일본 대지진 때 발생한 원전 사고가 분명 존재함에도 그 어긋남을 그저 일상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일본 자체를 비판하는 시선이 아주 노골적으로 느껴진달까. 물론 세카이계 청춘물의 골격도 꽤 튼튼해 단순 사회비판 이상의 유희를 준다는 것도 장점이다.
믿고 보는 HBO 드라마로, 이번에도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 예전에 게임의 시네마틱 영상을 모두 보면서 언젠가 드라마로 나오면 꼭 보고 싶다고 다짐했던 작품이다. 페드로 파스칼이 조엘 역으로 찰떡이었고, 벨라 렘지도 엘리 역을 생생히 잘 해냈다. 시즌2에서 조엘이 어떻게 되는지는 인터넷에 하도 말이 많아 알고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과정까지 미리 알게 되면서 조금 관심이 식긴 했다.
기대를 너무 안 해서 그런지 생각보다 재밌다. 일본 특유의 끈적끈적한 불쾌감이 드라마 내내 이어져서 숨이 막힌다. (좋은 의미로) 주인공은 정상인의 범주에서 벗어난 폭력 형사고, 악의 축의 리더는 의외로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만 악에 물든 집단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 이런 묘한 구도가 꽤 매력적이다. 언제부턴가 일본 드라마에 기대를 거의 안 하게 되었는데, 의외의 한 방을 먹은 거 같아서 기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