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매달리기와 수영강습 사이: 용해숙의 공사판 읽기
글: 곽영빈 (미술평론가/영화학 박사)
I. 너절한 풍경의 건축술
용해숙의 신작 전시는 총 네 편의 사진 작업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은 가로/세로 3:1(270cm×90cm)의 비율로 작년 말 나무화랑에서 열린 전시에 선보였던 거대한 사진 작업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거기엔 언제나 작가 자신이 등장하는데, 그는 각각 스케이트를 타거나 스킨스쿠버 중이고, 확성기에 입을 대고 무언가를 외치거나 철봉에 매달려 있다. 하지만 작가 중심의 이러한 묘사는 개별 작품을 바라볼 때 관객이 갖게 되는 즉자적인 인상과는 거리가 멀다. 성인 남성 두 명이 연달아 누워야 간신히 채워질, 가로로 길게 펼쳐진 화폭엔 평균 열 가지 이상의 소품, 혹은 사물들이 널려, 아니 널브러져 있기 때문이다.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것처럼 보이는 작업만 해도, 후경에는 중년의 부부가 타고 있는 슬로우바이크가 있고 화면 우측 상단에는 한 남자가 카약에 타고 있으며, 화면 왼쪽에는 장난감 낚싯대를 쥐고 있는 아이가 있는데, 그 앞으로 수십 개의 타조 알과 구슬들이 깔려 있고, 그 옆에는 배를 까뒤집은 듯 속이 노란 알배추 두 포기가 보인다. 이 외에도 부표와 오징어 배 전구, 파란색 쓰레받기와 주황색 빗자루, 초록색 간이 의자 위에 놓인 노란색 안전모, 꽃 풍선에 연까지 온갖 사물들이 어색한 거리와 친밀감 속에 배치되어 있다. 이 다종 다기의 소품들이 뮤트된 채 만들어내는 시각적 사운드 스케이프를, 그저 ‘복잡하다’라고 지칭하는 것만큼 단순한 것도 없을 것이다. 그나마 그럴싸한 표현을 찾는다면, ‘너절한 풍경’ 정도가 어울린달까? 이 ‘너절한’이라는 표현은, 작년 전시에 포함되었던 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 작업 또한 못지않게 ‘너절한’ 소품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다시 눈에 띄는 대로만 열거해도 구겨진 싸구려 플라스틱 만국기 뭉치, 텅 빈 맥주 상자, 제프 쿤스의 보라색 ‘풍선 개’를 닮은 도자기 인형, 전시공간이나 공사장에서 쓸 법한 자재용 나무막대들과 널빤지들, 조그마한 석고 두상 둘, 둘둘 말리다 만 동양 자수 족자, 말라죽다가 만 나뭇가지와 잎들, 잠망경처럼 보이기도 하는 플라스틱 파이프, 먹다가 만 수박 조각, 초록색 커버가 드리워진 둥근 테이블 등, 만만치 않은 것들이었다. 물론 화면 가운데엔 역시 작가 자신이 하얀, 더 정확히 묘사하자면 ‘후줄근한 난닝구’를 입은 채 머리를 감고 있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솔직히 이토록 세세한 묘사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혼란만 가중할 가능성이 더 크다. 대체 이 너절한 잡동사니들을 가지고 어쩌라는 말인가? 이 질문은 이번 전시를 구성하는 개별 작품들 속의 사물들을 눈으로 꼼꼼히 스캔할 성실한 관객들은 물론, 작년 전시를 찾은 일련의 관객들 머릿속을 분명히 맴돌았을 질문이다. 과 함께 전시되었던 두 작품, 즉 과 역시 각각 열 종류가 넘는 사물들로 넘쳐났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미리 말해두자면, 이들이 말 그대로 서로 아무런 관련 없는 잡동사니일 뿐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 유치찬란한 색깔의 아이들 장난감으로 가득한 지방의 식료품점 한가운데에 선 작가는, 작은 장난감 우산을 쓴 채 그에 못지않게 조그만 지구본에 ‘진지’하게 물을 주고 있었고(), 초록색 옥상 공간에 펼쳐진 속의 작가는 관객에게 등을 보인 채 불타오르는 쟁반을 머리에 이고 있지만, 그 주변에는 일련의 에어컨들이 가득했던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대립과 모순, 혹은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 사이의 ‘너절한’ 공존은, 넓은 의미에서 동양적인 것들(족자와 검은 머리의 작가)과 서양적인 것들(플라스틱 만국기와 석고 두상), 혹은 수직과 수평 사이의 대립에 의해 관류되었던 의 머리 감기 행위를 통해 “정화”될 수 있을 무엇으로 간주되었는지도 모른다.[1] 좀 채 자랄 리 없는 지구본에 물을 준다는 설정이나 일련의 변압기나 전력 코드들과 분리된 에어컨들에 둘러싸여 활활 타오르는 쟁반 위의 불처럼 분명 개연성은 낮지만, 이들은 독일에서 열린 전시에서 작가가 제사 epigraph로 사용했던 괴테의 경구, 즉 “길에 놓여진 돌로도 [아름다운 것을] 지을 수 있다 Auch aus Steinen, die in den Weg gelegt werden, kann man [Schönes] bauen”는 말처럼, 옅게나마 세울 수 있었던 건축적 열망, 혹은 궁극적 해소에의 전망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전시에는 찾을 수 없는 것들 말이다.
II. 폐허의 토목공학
그렇다고 이번 작업들이 ‘너절’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며 (이 ‘너절함’은 용해숙의 사진 연작뿐 아니라 이번 전시에서도 핵심적인 요소이다. 건축의 요소 역시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그것은 그 말의 엄격한 의미에서 내재적으로 분기하면서 더욱 정교하게 세공되는데, 이번 전시 전체를 관류하는 이 형상을 한 마디로 응축하면 아마도 ‘폐허 ruins’가 될 것이다. 앞에서 우리가 묘사했던 네 작품에서 작가는 “스케이트를 타거나 스킨스쿠버 중이고, 확성기에 입을 대고 무언가를 외치거나 철봉에 매달려 있”지만, 이들 각각의 공간은 모두 일종의 ‘공사판’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스피드 스케이트를 타고 스킨스쿠버를 하는 공간은 육중한 철근 기둥들로 둘러싸여 있고, 확성기를 들거나 철봉에 매달린 공간은 각각 반쯤 헐려 있는 집 속이거나, 배경에 거대한 포클레인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단정과 묘사엔 오해의 여지가 있다. 철근 기둥들로 둘러싸인 앞의 두 공간은 곧 공사가 시작되거나 궁극적으로 완공될 건물을 전제할 것 같지만, 우리가 보는 이미지만 봤을 때에는, 그 상태로 공사가 중단된 것일 수도 있다. 또한, 위에서 방금 “반쯤 헐려 있는 집”이라고 묘사한 주택 역시 이미지만 봤을 때 정말 반쯤 헐린 것인지, 반쯤 지어진 상태인지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포클레인이 배치된 작업에 대해서도 비슷한 말을 할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철봉에 매달린 작가의 상태에 대해서도 똑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는 버티고 버티다 떨어지기 직전의 상태에 있는가, 아니면 이제 막 매달린 상태인가?’ 하지만 이러한 시간적 모호함과 양가성이야말로 우리가 염두에 둔 ‘폐허’의 핵심 구성요건이라 할 수 있다. 주지하듯, 이는 전후의 현대 미술사에서 ‘폐허’를 핵심적인 키워드로 복권하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로버트 스미슨이 포착했던 특성 중 하나로, 그는 이를 “건물은 그들이 지어진 후에 폐허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지어지기 전에 폐허로 일어선다”라고 절묘하게 포착한 바 있다.[2] 이 모호한 시간성은 그가 켄트주립대에 설치했던 작품인 (1970)에서 압축적으로 구현된 바 있는데,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는 이 작업의 기록 사진들 대부분이 웅변하듯, 우리는 해당 헛간이 절반쯤 지어지고 만 ‘미완’의 상태인지, 아니면 이미 ‘완공’된 지 오래인 헛간이 ‘풍화’되어 절반쯤 파묻힌 것인지 구분할 수 없다. 이러한 특징은 “바닷물과 풍화로 삭은 오래된 유물(나무)을 발견, 건지는지, 살펴보는지, 몸을 기대는지 모호하게 시선은 앞을 본다”라거나, “스쿠버는 탐사(집터/땅)를 고르듯, 과거 역사로 여행하듯” 유영한다는 스킨스쿠버 작업 사진에 대한 작가의 노트와 정확하게 공명하는 것이다. 해당 작업을 포토샵을 이용한 콜라주나 아상블라주의 변주 정도로 이해하려는 게으름과 달리, 이는 사태의 핵심이 ‘폐허적 시간성’에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이 건물이 언젠가 폐허가 되거나, 이전에 유물이 수장된 공간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시간의 내재적 분기점으로 우리를 되돌려 보낸다. 스미슨이 ‘엔트로피’, 즉 열역학 제2법칙을 통해 파악했던 이러한 시간의 내재적 분기점을 역사철학적으로 가장 엄밀하게 파고들었던 이는 물론 벤야민인데, 그가 교수 자격 논문으로 제출했던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이번 전시의 통주저음에 해당하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최상층으로 간주되던 왕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부활은커녕 그저 ‘자연사 Naturgeschichte’적인 죽음과 풍화의 운명에 전적으로 노출되는 이 세계의 핵심에 자리 잡은 건 ‘폐허 Ruine’로, 이 “폐허와 함께 역사는… 저지할 수 없는 몰락의 과정으로 부각”된다.[3] 예를 들어 이 세계에서 과일은 “만개한 꽃”이 아니라 “과숙 Überreife” 즉 지나치게 푹 익어 사그라들거나 먹을 수 없는 상태로 묘사되고, 당대의 엠블럼 선집에는 “반쯤 피어나면서 동시에 반쯤은 시든 장미꽃”이 등장하곤 하는데, 이는 확성기와 말이 등장하는 사진에서 아직 생생한 생선과 함께 배치된 또 다른 물고기, 즉 (작가의 묘사를 빌면) “고양이에게 살이 뜯긴 대방어의… 임신하여 팔지 않은 이 마을의 하나 남은 마지막 말을 향한” 머리와 노랗게 뜬 알배추는 물론, 에 포함되었던 먹다 남아 부패할 가능성이 큰 수박을 통해 이미 예고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지극히 “세속적”이고 “저열”하며 “자연적”인 사물들이 꾸미는 “음모”를 통해 작동하는 바로크 비애극의 핵심을 파악하고 나면, 자신이 “5년 전 서울 사람이 매입한 후 외벽이 부서진 채 방치된 집”이라 묘사한 공간 속에서, 마치 “과거의 사람처럼, 신화 속 사이렌처럼” 알 수 없는 노래를/경고를 들려주는 인물로 분한 작가의 (무의식적) 결정은 물론, 해당 집안의 “원형 거울엔 부서진 집 맞은편 신축된 건물이 비춘다”라는 작가의 또 다른 묘사가 왜 해당 작업과 이번 전시 작업 전체의 배경으로서, 그가 “최근 남한에서 가장 콘크리트를 많이 소비하고 있는” 곳이라 규정한 의미에서의 제주도를 배경으로 삼은 것인지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그가 뚱딴지같이 스피드 스케이트를 타는 콘크리트 바닥 공간이 슬로우바이크와 물에서 타는 카약, 또는 어린이 낚시터의 잠재적 공간으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이는 “시간의 흐름이 공간 속으로 투사되”고 “기억할 만한 모든 것을 한데 모아두”며, “역사가 무대 속으로 세속화”되는 바로크 비애극의 양상을 보여주는데,[4] 궁극적으로 이는 그의 이 기다란 사진 연작들이 취하는 양태를 장-프랑스와 셰브리에가 “타블로 형식(la forme-tableau)”이라 명명한 것과 구분해주는 동시에,[5] 해당 공간이 서로 다른 시간과 속도를 통해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스미슨의 이 육화한 ‘이중적 시간성’과 공명하면서) 이전의 혹은 다가올 ‘파국’과 폐허를 잠재적으로 담지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때까지의 시간이 과연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는 없는 걸까? 이번 전시의 작업에 따르면 그 시간은 크게 둘로 분기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하나는 철봉에 매달린 작가가 땅에 떨어질 때까지이며, 다른 하나는 이제 철근 기둥들만 올린 새 건물이 바다에 수장되어 유물이 될 때까지이다. 물론 여기엔 지난 몇 년 동안 한국의 담론과 예술계를 떠돌던 ‘파국론’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하지만 벤야민이 명확하게 짚고 아감벤이 자신의 문헌학적 정체성을 드러내며 다시 인준했듯이, 초월적 세계로의 출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 세계에서 “바로크적인 종말론은 존재하지 않”는다.[6] 역설적으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지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그것이 종말에 다다르기 전에 쌓아놓”고, 그 배치와 순서를 “유희적으로 뒤바꾸는,” “광적으로 그러모으”면서도 “배치하는 데서[는] 느슨한” 일견 모순된 ‘반복강박 Wiederholungszwang’이 그의 작업을 계속해서 가로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잠정적으로 “환타지야 5부작”이라 명명된 그의 다음 전시가, 아마도 한국을 벗어나 전 세계를 넘나들며 ‘따로 또 같이’ 변주해낼 단초들이, 이번 전시 속에서 어떻게 예고되고 있는지를 더욱 꼼꼼히 읽어내야만 할 것이다.
►용해숙 2019 개인전 도록 “파국의 삼각”
전민영, ‘거리를 두고,’ 『너절한 변명 Billige Ausrede』, 서울: 분홍, 2018, 12쪽. ↩
Robert Smithson, “A Tour of the Monuments of Passaic, New Jersey,” (1967) in Jack Flam ed. Robert Smithson: Collected Writings, L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96, p. 72. 강조는 저자. ↩
발터 벤야민, 『독일 비애극의 원천』 최성만, 김유동 옮김, 한길사, 2009, 267쪽. ↩
위의 책, 139, 135쪽. ↩
Jean-François Chevrier, “Documents de culture, documents d’expérience.” Communications, no. 79, 2006, p.72. ↩
벤야민, 위의 책, 95쪽. Giorgio Agamben, State of Exception, trans. Kevin Attell,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5, p. 56.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