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다른 계획 없이 숙소를 잡고 출발하고 도착하고 돌아다닌 첫 여행이다. 가장 최근 경주를 갔었던 주변인은 친구 Q였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친구의 여행은 결혼 뒤 아기 Q를 낳기 전에 배우자와 함께 갔던 여행이었다. '어디가 좋더냐'는 질문에 Q는 '그냥 불국사 석굴암 이런 데, 수학여행 때 갔던 곳들 다시 가보면 좋아. 그때랑 전혀 다르다니깐.'이라는 말을 해줬다. 나는 경주가 고1 때 수학여행으로 갔었던 곳임을 그제야 떠올릴 수 있었다.
*계절이 아마 초여름 정도? 고1 수학여행 경주의 기억은, 당시 사귄 지 몇 개월 안 되었던 다른 학교에 다니던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하니 보고 싶다며 상대방이 울었던 것. 첫 번째 날 밤 장기자랑에서 가장 친했던 친구 C와 드렁큰타이거의 'G Fresh'를 무대에 올라 불렀던 기억 정도만 남아 있다. 당돌했던 시절이었다. 아마 불국사도 석굴암도 가봤을 텐데, 갔었는가 하는 질문이 뒤따를 정도로 아무 기억이 없어 신기할 정도다.
*어차피 운전해서 다닐 텐데, 계획은 무슨 계획이냐, 가벼운 마음으로, 다만 어쩔 수 없이 큰 가방 둘(여벌 외투로 패딩에, 츄리닝에 잘 어울리는 편하게 신는 런닝화도 포함되어 있다)을 쟁여 가족들로부터 대체 짐이 뭐 그렇게 많냐는 익숙한 타박을 들으며, 시동을 걸고 여행을 출발했다. 오래된 차는 카오디오가 말썽이라 음악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고, 출발부터 과히 언짢지만 어쩔 수 없기에 태블릿 스피커로 노래를 들으며 고속도로를 달렸다.
*도착지인 숙소까지 332km가 찍혔고, 220km 정도 남았을 때 첫 번째 휴게소에 들어가 도넛과 샷 추가한 커피를 마셨다. 이거 큰일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피곤과 졸음이 밀려왔는데, 생각해보니 수도권을 바깥 목적지까지 운전을 하는 게 너무 오랜만이기는 했다. 몬스터 세 캔을 휴게소 편의점에서 샀다. 샷 추가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기운을 채우는데, 휴게소 푸드코트 옆자리에 꼬마가 엄마가 썰어준 돈가스를 한입 한입 오물대며 잘 먹고 그 와중에 옹알옹알 뭐라 떠들며 내 관심과 시선을 느꼈는지 가끔 날 향해 웃어주는데 너무 귀여웠다. 다시 고속도로에 올라타며 아버지가 지금 내 나이 즈음이면 여섯 살짜리 나를 키우고 있었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다. 요즘이야 나만 늦은 것도 아니고, 아버지는 그 또래 중에서도 좀 빠른 편이었다며 대충 생각을 접고 운전에 집중했다.
*오랜만인 장거리 운전은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절반 좀 지났을 무렵 졸음쉼터에 들러 몬스터를 한 캔 따서 반쯤 마시며 쉬다가 다시 출발했고, 떨어지는 기운을 실시간으로 채우듯 몬스터를 드문드문 홀짝이며 운전을 했다. 두 번째 휴게소는 경주까지 얼마 남지 않을 무렵에 화장실을 쓰러 들렀다. 그렇게 네 시간 반에 걸쳐 경주에 예약해 둔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는 기대보다 더 말끔하고 친절했다. 관광단지 안에 있는 좀 위태로워보이는 상가 2, 3층을 널찍한 일부를 쓰는 곳이었는데, 입구를 들어서면 다른 세상에 들어온 것처럼 안온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샤워실과 화장실, 소지품 보관함은 여기 있다는, 조식 시간이 아침 8시에서 10시 사이이며 밤 10시 이후에는 현관문이 잠길 것이며 비밀번호는 이것이라며 친절한 안내가 이어졌다. 오후 3시가 좀 넘은 시각이었고, 아침부터 먹은 건 휴게소에서의 도넛에 커피뿐이었는지라 밥을 먹으러 나섰다. 뭘 먹으러 가야 하나 궁리하다 김밥이나 백반을 가볍게 먹으면 되겠다며 성동시장으로 향했다.
*관광지 시장 현대화 사업 덕분인지 주차장 건물이 꽤 큼직하게 들어서 있었고, 알아둔 김밥집과 '부페식'으로 백반을 판다는 가게는 주차장에서 시장으로 진입하자마자 앞에 있었다. 우엉김밥으로 유명하다는 집에서 김밥 두 줄을 샀는데, 1인분에 4,000원이라고 쓰여 있길래 김밥 한 줄에 4,000원이라니 관광지는 관광지로구만 생각하며 두 줄 달라 할머니 사장님께 주문하고 만 원짜리를 내미니 잔돈이 6,000원이 돌아왔다. 1인분은 김밥 두 줄이었다.
*부페식 백반집은 이 시장의 특화된 식당 형태인 걸로 보였고, 아마 시장 상인들 식사를 해결하는 곳으로 시작했을 법한 가게들이 옹기종기 똑같은 형태로 모여 있었는데, 여긴 따로 알아둔 곳이 없어 그냥 지나가는데 '식사 하시게?'라 말을 거는 가게에 앉아 밥을 먹었다. 밥을 두 공기 먹고, 반찬도 한 바퀴 더 집어 담아 다 먹었다. '시랏국'은 시래기국이었고, '살'은 쌀이었다. 반찬은 특별할 것 없는 시장 밥집의 반찬이었는데, 밥맛이 좋았다. 밥을 더 담아주시던 주인 아주머님은 '살이 좋아서 밥이 맛있다'고 하셨다. '멀리서 왔느냐'는 질문에 서울에서 왔다 답하니, '말쑥해서 그럴 것 같았다'라고 다시 받아주셨다. 칭찬 비슷한 말로 들려서 기분이 꽤 좋았다.
*배를 채웠으니 해가 지기 전에 어디라도 가봐야겠다 싶어 지도 어플을 켜보니, 근처에 바로 대릉원이 있었다. 대릉원 근처 주차장으로 차를 옮겨 대놓고 매표소로 보이는 곳까지 걷는데, 바람에 추위에 심상치 않은 한기가 느껴졌다. 매표소에 가니 미러리스 카메라를 한쪽 손목에 걸쳐들고 있어서 그랬는지, 안내해주시는 분이 '기가 막힌 포토존이 저쪽에 있다'면서 '엄마 젖무덤 같이 봉긋하게 두 언덕이 사진이 찍힌다'는 방향을 일러주셨고, 거기서 사진을 찍고 쭉 돌아서 천마총에 가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제서야 여기가 천마총이 있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경주는 무계획 여행에 최적화되어 있는 곳이었다.
*기가 막힌 포토존이 대충 어딘지 알 것 같기는 한데, 생각하지 못했던 한파에 몸을 떠느라 사진이고 나발이고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고, 후드로 귀를 가리고 한 바퀴 얼른 돌아 천마총 들렀다가 빨리 차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천마총이 반전의 장소였다. 에어커튼의 센 바람이 느껴지는 입구를 지나자마자 온기가 느껴지는데, 신라의 은총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평일 저녁에 대릉원을 온 관광객들 대부분이 온기를 쬐며 천마총 안 전시물들을 천천히 구경하고 있었고, 나도 그 몇몇 무리에 합류했다. 신라 시대 동아시아 교역품의 증거라는 새파란 크리스털 잔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여유가 있었으면 한참 더 들여다봤을 텐데 되려 혼자여서 발걸음을 서두르게 되었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싶어 알아뒀던 카페로 걸음을 옮겼다.
*추위를 뚫으며 당도한 알아뒀던 가게는 닫혀 있었다. 오던 길에 '이 정도면 괜찮아 보이는데' 싶던 다른 가게에 들어가서 아메리카노를 시켜 마셨다. 오, 기대 이상으로 맛있는 아메리카노, 였다. 커피 사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묘한 필터커피 드립커피 선호증은 생겨 필터커피 안 파는 가게는 우선 미뤄둔다, 는 이상한 기준으로 카페를 정해 가보고는 했는데. 이 가게는 제대로 내린 에스프레소를 담은 아메리카노가 어떤 맛인지 알려주는 수준이었다. 언제까지 유행할까 이제는 두고 보게 될 노출콘크리트 분위기의 인테리어에 JBL스피커에서는 꽤 가게 분위기에 어울리는 힙한 느낌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음 목적지는 안압지였다. '밤에는 안압지에 가라'던 대학원 동기 Y의 추천 때문이었다. 한 번 추위에 호되게 당한지라 이를 맞서보겠다는 의지로 편의점에서 4개에 3,000원 하는 묶음으로 파는 핫팩을 샀다. 핫팩은 군대에서만 필요한 물품이 아니었다. 안압지의 정식(?) 명칭은 '동궁과 월지'였고, 동궁과 월지의 동이 겨울 동자로 느껴질 만큼 정말 추웠기에 핫팩은 주머니 속 연명 도구 정도로 쓰였다. 물이 있어 그런지 바람이 더 매서웠는데, 그나마 산책로를 따라 걷는 중 나무들이 있는 부근에서는 추위가 한결 덜했다. 조명이 모든 걸 아름답게 포장해내고 있었다. 낮에는 아마 황량한 느낌을 감추기 어렵지 않을까 싶은, 하지만 밤 어둠 속 조명에 물과 복원된 건물들과 나무까지 모든 게 적절하게 아름다워 보였다. 덜하게 느껴지는 추위와 적절한 아름다움 덕에 대왕릉 때보다 훨씬 더 여유롭게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보니 딱히 잘 나온 사진이 없는 건 따로 카메라를 들고 사진 찍는 것도 너무 오랜만이었기 때문이겠거니 한다.
*동굴과 월지 입구에 붙어 있는 기념품 파는 가게에 들어가 뭐라도 살까 구경하는데, 가장 마음에 드는 건 30,000원짜리 커피잔 세트였다. 은은한 색에 모양은 약간 투박하면서 소박한 느낌의 질감에 꽃무늬가 가볍게 그려진 잔과 받침 세트였다. 커피잔은 지금 사둬야 뭐하나 나중에 많이 사서 쌓아둘 거라며 두어 번 더 집어 구경하다가 겨우 지나쳤고, 뭐라도 하나 사기는 사야겠다 싶어 토끼 캐릭터가 그려진 작은 손거울을 5,000원 주고 샀다. 역시 귀여운 건 세상에 큰 도움이 된다.
*배운 게 도둑질, 가본 게 스벅이라는 말이 적절할 테다. 이 글의 초벌은 스타벅스 경주대릉원점에서 쓰고 있다. 주차장도 널널하고 매장 공간도 입구에서 가늠한 것보다 훨씬 널찍한, 아마 관광객이 몰릴 주말이 아닌 이상 베스트가 아닐까 싶은 매장이다. 심지어 경주이기 때문인지 좌식 테이블이 6개 놓여져 있는 바닥 공간이 매장 안쪽 한켠에 따로 마련되어 있기도 하다. 나야 익숙한, 콘센트가 있는 도톰한 테이블 자리를 차지하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지만. 리저브매장이라 '커피를 한 잔 마신지 얼마 안 되어서, 좀 연한 메뉴를 추천해달라'는 부탁에 방금 내렸다는 '에콰도르 엘 아와카' 원두 샘플잔을 건네주셨고 딱 원하던 맛에 느낌이라 반색하며 주문했다. 점원분도 참 친절했다.
*이 별거 아닌 일기를 한 시간 반 넘게 썼다. 글 비슷한 거나마 쓰는 데는 참 시간이 많이 든다. 숙소로 돌아갈 시간, 22시 29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