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정에 대하여 : 콰이로맨틱 정체화글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이 문장은 내가 수능을 치렀던 해의 필적확인 문구였다. 문제풀이에 온 정신이 쏠린 와중에도 나는 왠지 이 문장이 몹시 마음에 들었었다. 여러 해가 지난 지금은 그 이유를 안다. 나는 사랑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오해를 살까 봐 덧붙이자면, 아마도 이 말을 들었을 때 당신이 생각했을 법한 의미와는 조금 다를 것이다.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여러 답이 있다. 가까운 이에게 느끼는 친애와 호감, 집단에 소속된 연대감, 타인을 보살피고자 하는 마음, 신과 종교에 대한 믿음, 혹은 강한 집착이나 소유욕 등……. 우리는 참으로 다양한 감정들을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이쯤이면 사랑이라는 게 존재는 하는지, 어쩌면 미디어가 주입한 환상은 아닌지, 그냥 내가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으면 그게 사랑이 되는지 헷갈릴 지경이다.
이렇듯 우리가 생각하는 사랑의 범위는 굉장히 넓지만, 그렇다고 사랑이라는 표현을 써서 대화할 때 의미를 알지 못해 혼선을 빚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사랑을 일컬을 때 그것은 연애감정, 즉 로맨틱한 끌림으로부터 비롯된 마음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곧 연정을 뜻한다. 내가 나의 존재 의의가 사랑이라 말했을 때, 당신은 내가 연애감정을 나누길 원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다.
인간의 전 생애를 통틀어 연애감정이 가장 궁극적이고 중요한 감정이라고 볼 수 있을까-설마 자손 생산이 인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에 그를 위해 연애감정이 중요하다는 사람은 없겠지-? 그것만큼이나 소중한 감정과, 그 감정을 바탕으로 한 관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연정은 가장 보편적인 사랑으로서 통하는 것일까? 에이로맨틱은 타인에 대한 낭만적(로맨틱한)끌림을 매우 드물게 느끼거나, 아예 느끼지 않는 것. 혹은 그러한 이들을 말한다. 무로맨틱 또는 무연정자라고도 한다. 무로맨틱 혹은 무연정자는 감정적 관계가 부족하거나 이러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로맨틱한 감정을 기반으로 한 관계를 형성할 본능적 욕구가 없는 사람이다. 로맨틱한 끌림을 느낄 수 있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로맨틱한 관계를 맺지 않는 비연애와는 다르다. 무로맨틱이라도 파트너와의 협의에 따라 연애관계를 형성하는 경우도 있다.무로맨틱은 낭만적 끌림의 양상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으로 존재한다. 이를 통틀어 무로맨틱 엄브렐라라고 한다. 다른 성소수자들이 그러하듯이 무로맨틱은 그들과 다른 주류 사회, 즉 유연정자 사회와 불화한다.
북미 무성애 커뮤니티인 AVEN에서는 끌림attraction을 사람들을 서로 끌어당겨 모이게 하는 정신적이거나 정서적인 힘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끌림을 정의하고 분류하는 방법은 사람들마다 다르다. 그 중에 몇 가지만 들어 설명하자면, 우선 성적 끌림은 끌리는 상대와 성적 접촉을 하고 싶은 욕구를 말한다. 로맨틱 끌림은 끌리는 상대와 로맨틱한 관계를 형성하고 싶은 욕구다. 플라토닉한 끌림은 섹슈얼이나 로맨틱이 없는 종류의 끌림이며 우정으로 그 예를 들 수 있다. 로맨틱 끌림을 바탕으로 형성된 마음을 크러시crush, 플라토닉 끌림을 바탕으로 생겨난 마음을 스퀴시squish라고 한다.
무성애자에 대한 잘못된 인식 중 하나는 그들을 감정이 없는 냉혈한이라 여기는 것이다-물론 사실이 아니다-. 무성애자를 향한 이러한 혐오는 무성애자뿐만이 아니라 무로맨틱들도 괴롭게 한다. 이것은 무성애자와 무로맨틱을 혼동하여 이들 쌍방에게 향하는 혐오이기 때문이다. 무성애자는 성적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로, 로맨틱한 끌림을 느끼지 않는 무로맨틱과 다르다. 유성애자들은 ‘무성애자=사랑을 하지 않는다=감정이 없다’ 라는 2중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크러시만이 사랑이 아니라는 점까지 포함하면 3중의 오류인 셈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끌림의 종류를, 사랑의 성질을 구분하고 있지 않다. 무로맨틱을 향한 많은 편견과 혐오가 사랑의 성질을 구분하지 않는 것에서 기인한다.사랑은 몹시 추상적이고 포용적인 개념이다. 우리가 느끼는 끌림과 그로부터 비롯된 사랑이 획일적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끌림들은 성질과 양상에 따라 명확히 분류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뭉쳐버린다. 연애를 중시하고 낭만화하는 이 사회에서, 이는 결과적으로 연애감정이 아닌 사랑을 지우는 꼴이 된다.연정은 사랑이지만 사랑은 연정이 아닐 수도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연정이다. 실로 의미 오염이 아닐 수 없다. 이정도면 아예 연애감정을 사랑에서 독립시켜도 되지 않을까?
우리 사회는 연애 중심적이다. 이 세상에서 사랑(연애감정)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돈만큼이나 절대적인 가치다. 우리는 지나칠 정도로 사랑(연애감정)을 중시하며 숭상한다. 우정을 바탕으로 형성된 친구관계는 연인관계와 마찬가지로 서로에 대한 친애를 바탕으로 형성된 관계이다. 그러나 친구관계는 연인관계보다 중요하지 않거나 우선순위가 밀려나는, 하위의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사랑’을 하고 짝을 맺는 것은 정상적인 사회화 과정으로 간주되며, 연애나 결혼을 하지 않는 이는 사회 부적응자이거나 하자가 있다고 여겨진다. 인간이라면 사랑하고 사랑받길 원하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모두가 사랑을 참 좋아한다. 너무 당연한 나머지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이런 사고는 무로맨틱, 무성애자 혐오뿐만이 아니라 비혼주의자들을 인정하지 않는 것으로도 이어진다(독신, 비혼은 성 정체성과 상관없이 개인이 선택한 삶의 방식이며, 무로맨틱이나 무성애와는 다르다!). 콰이로맨틱은 무로맨틱 엄브렐라에 속하는 정체성으로, 로맨틱 끌림과 다른 끌림 사이의 차이를 정의하지 않는 것, 또는 그런 사람을 말한다. 플라토니 로맨틱, 혹은 WTF로맨틱이라고도 한다. 콰이로맨틱은 기존의 로맨틱지향성 개념이 자신에게 맞지 않거나 이해하기 어려워 적극적으로 비정체화하는 사람들이다-성적 끌림과 다른 끌림 사이의 차이를 정의하지 않는 것, 혹은 그런 사람은 콰이섹슈얼이라고 한다-.나는 지금 스스로를 콰이로맨틱으로 정체화하고 있다. 난 플라토닉한 끌림과 로맨틱한 끌림 사이의 구분에 어려움을 느끼고, 내가 느끼는 것이 크러시인지 스퀴시인지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중요한 건 이 감정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정의하는 것 보다, 나와 내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은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생물이고, 나 역시 사람인지라…….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체성에 대한 탐색을 계속하고, 만족할 답을 찾지 못해 체념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누군가를 마음에 둘 때, 나는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것이 연정인지, 대상에 대한 호감과 친애인지, 서로 교감하여 쌓은 유대감인지 판단할 수가 없다. 어떨 땐 연정은 아니고 아주 깊은 우정 같기도 하다. 다른 때엔 아주 강한 감정과 애착-혹은 집착-을 느껴서 당황스럽다. 그러나 또 어떨 땐 틀림없이 연정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 생각해 보면 그 역시 틀렸다는 생각이 든다.
내게 사랑은 무엇일까? 내가 느끼는 것은 플라토닉한 끌림일까, 로맨틱한 끌림일까. 그도 아니면 제 3의 끌림일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여길 때, 내가 그에게 가지는 감정은 어떤 성질의 것일까?
실은 나도 잘 모른다. 크러시는 아니고 스퀴시인 거 같다고 생각했지만 어떤 때는 크러시가 맞는 거 같기도 하고 크러시이면서도 스퀴시인 거 같을 때도 있다. 어쩌면 크러시로도 스퀴시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워낙 사랑을 좋아하는 세상에서 나고 자라다 보니 사랑이 아닌데도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나의 정체성에 대해, 연정에 대해 탐색하는 것은 이 과정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대체 사랑이란 건 뭔지, 애초에 사랑이란 게 존재는 하는 건지 알 수 없어져버린다. 이쯤 되면 결국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만다. 새로이 정체성 탐색을 시작했다가 다시 ‘콰이로맨틱-끌림을 정의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이름 아래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는 셈이다. 한편으로는 이런 행위가, 이런 행위를 유지하는 상태가 나를 콰이로맨틱이라 부를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자신에 대해 탐색하는 것은 즐겁고 흥미로운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에너지를 몹시 소모하는 일이기도 하다. 피로감은 피로감대로 느끼지만 그만한 만족감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마치 끝나지 않는 퀘스쳐닝 중인 기분이다(퀘스쳐너리가 불완전한 정체성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내게는 내가 느끼는 사랑을 표현할 말이 없다.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내 내부의 언어와 외부의 언어가 괴리되었다는 사실을 알지만, 내가 알고 구사하는 언어는 결국 외부로부터 온 것이다. 때문에 나는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설명할 수 없다. 외부의 언어에 그 개념이 없거나, 내가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콰이로맨틱은 무로맨틱 엄브렐라로 분류되고 있고, 나 역시 그에 순응해 내 자신이 무로맨틱 엄브렐라에 속한다고 여기고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나 사랑하기를 원하고 사랑받기를 원하는데 무로맨틱이라고 볼 수 있을까? 정체성은 본인이 정의하기 나름이다.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을 콰이로맨틱으로 정의하되 무로맨틱 엄브렐라에 들기를 거부한다면, 콰이로맨틱이지만 무로맨틱 엄브렐라는 아닌 콰이로맨틱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콰이로맨틱이, 내가 무로맨틱 엄브렐라에 포함되는 이유를 분명히 이해하고 있다. 규범적인 사랑의 정의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콰이로맨틱은 분명히 유연정자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연정에 대한 탐색만큼이나 정체성에 대한 탐색 역시 모호하고 불분명하고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누군가 WTF로맨틱이라는 이름을 붙인 심정을 이해하게 된다.
무성애자들은 유성애자들과, 유성애 중심적인 세상과 불화한다.하지만 나는 무성애 집단과 유성애 집단 어디와도 화하기 어렵고, 동시에 어디와도 불화하기 어렵다. 마치 들짐승과 날짐승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박쥐가 된 기분이다. 발 디딜 곳이 없는 것 같고, 작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박쥐는 들짐승도 날짐승도 아닌 박쥐일 뿐이고, 그것이 박쥐가 비난받을 이유가 되지 않는데 말이다.
글을 마치기 전에, 이 글은 모든 콰이로맨틱을 대표함이 아닌 나 자신의 의견과 경험을 쓴 것임을 말해두고 싶다. 끌림과 연정의 형태와 양상은 세상에 존재하는 개인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고, 이는 자신을 콰이로맨틱으로 정체화 한 이들의 안에서도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그들이 어떻게 정체화하였는지, 어떤 방식으로 로맨틱한 끌림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는지 역시 나와 다를 수 있다. 이 글을 통해 자칫 모든 콰이로맨틱들이 이러하리라 생각될까 우려하는 노파심 때문에 구태여 이런 사족을 붙인다. 이런 염려조차 하지 않아도 되도록, 더 많은 콰이로맨틱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다양한 정체성들이 가시화되고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 때는 나도 오독할 걱정 없이 당신을 사랑한다고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성애나 연정이라는 전제 없이, ‘오해’를 하지 않기 위해 사족을 붙일 필요 없이. 진실로 당신을 사랑하는 까닭에 대해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