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어문화축제 당일 아침에 쓰다 말았던 글, 개인의 일부를 부정한다는 것.
짧은 잠 청하며 무슨 꿈을 꾸었는지 눈뜨자마자 내 존재가 부정당했던 몇 몇 순간들이 떠올랐다. 우울증이라고 말했을 때, 대체 병원을 왜 다니냐 약은 왜 먹냐는 그 수많은 질문들. 답을 얻기 위함이 아니었고,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현이었다. 이거 해봐 저거 해봐 너무 쉽게 던져지던 조언들. 내 정신병때문에 너무 길고 힘든 시간 보내왔었고, 그게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모르는 현실인 와중에 그런 말들을 들어야했다. 그게 진짜 있는 병이냐 물으며 직접적으로 우울증을 부정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역시 절대 질문이 아니었다. 내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거니와 말 한 당사자는 스스로 너무 바쁜 사람이라 우울증에 걸릴 "여유"가 없다고 했다. 이런 일들을 나를 믿어준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말했을 때는 그런 말을 실제로 하는 사람이 있냐며 한 번 더 나의 힘듬을 부정당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니 내가 그런 말을 들었지. 우울증이라는 병이 실존하니 정신과 의사들이 우울증을 진료하겠지. 신나게 놀거나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고 쉽게 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병원에서 우울증 치료를 하는거겠지. 말하기 전에 한 번만 생각을 거친다면 나올 수가 없는 질문들인데 나는 우울증 당사자로서 그 말들을 들어야했다. 정신병에 대한 의문을 정신병 당사자 앞에서 말하는게 어떤 의미인지 정말 그들은 모르는가? 당사자 앞에서 당사자의 존재를 토론하는 것은 너무 끔찍한 일이다. 나는 그 많은 질문들 앞에서, 애초에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정신병에 대해 설명해야했다. 이것은 내 존재에 대한 해명이었다. 가정폭력 피해 사실은 또 얼마나 부정당해왔으며 앞으로 또 얼마나 부정당할지. 가해자가 나를 사랑할거라는 타인들의 확신은, 또 말은 얼마나 나를 괴롭혔는지. 가족들로부터 절연당한 지금은 "그래도 하나뿐인 자식인데 당연히 사랑하시지."같은 말은 들을 일 없을테니 홀가분하기까지 하다. 사실 이것도 확신은 못한다. 한 대 얻어맞았을 때 사랑을 주장하던 사람이 열 대 맞았다고 사랑을 부정하게되지는 않을 것 같다. 사랑이네 어쩌네 옛날 사람들이라 서툴어서 그런 것 뿐이라는 그 모든 말들은 어릴 때 부터 겪어야했던 방임과 폭력의 시간을 지워버렸다. 나는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다. 내 혈연 그 누구도 내 미래에 대해 나만큼 고민하지 않았다. 나는 내 인생을 챙기는 법을 일찍 익혔다. 아무도 내 인생을 챙기려 하지 않았으니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 우울증이 병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내게 왜 병원에 있지 않고 여기 왔느냐고 물었었다. 나는 병원에 쳐박혀있거나 우울증이 없는 채로 살아가는 것 외에 선택지가 없을까. 아니다. 우울증 환자는 다 똑같은 수준의 증상을 겪고있지 않다. 그냥 각자의 일상을 살아가면 된다. 나는 정신병 환자나 가정폭력 피해자가 아닌 나로서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정신병이나 가정폭력 피해에 대해 개인의 생각에 불과한 것을 근거로 들며 부정한다. 나는 어떤 부분은 떼어내고 어떤 부분은 유지하며 살아갈 수 없다. 가정폭력 피해나 정신병은 나를 설명하는 많은 언어들 중 하나에 불과하겠지만 나는 조립해서 만들어낸 로봇이 아니다. 삶을 살아가는 한 명의 사람이다. 내 존재의 일부를 부정하는 건 결국 나 자신으로하여금 내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했다. 그래서 퀴어 인권에 대한 이야기는 나에게도 의미가 있다.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이야기는 정신병과 가정폭력과 함께 간다. 내가 퀴어가 아닌줄 알고 참석했던 퀴어토크에서 눈시울이 붉어졌던 이유는, 내가 눈물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모든 배제와 차별의 경험은 공통점을 갖고있다. 그것은 일어나선 안될 일이다. 그런데 너무 많은 곳에서 일어나고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