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은 로고스를 파악(把握, be-greifen)하지 못하는(αξύνετοι, 아쉬네토이) 존재로서 로고스에 마주 서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특히 단편 34 참조). 이것은 'zueinander bringen'(서로를 함께 있도록 한다)을 의미하는 συνίημι (쉬니에미)라는 말의 부정이다:
αξύνετοι 인간들은..을 함께 있도록 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무엇을?
λόγος를, 즉 끊임없이 함께 있는 것을(was ständig zusammen ist), 모아 놓음(die Gesammeltheit)을, 인간들은 그들이 그것을 이미 들었든지 아니면 아직 채 듣지 못했든지에 관계없이, 함께 모아 있게 하지 못하는, 파악(be-greifen)하지 못하는 하나로 움켜쥐지 못하는 그와 같은 존재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다음 문구는 무엇을 의미하고자 했는지를 말해 주고 있다. 인간들은 비록 그들이 말들(Worten) 을 통해서, έπεα(에페아)를 통해서 노력한다 할지라도 로고스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과연 여기에서 말과 이야기가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λόγος(로고스)와는 다른 의미에서 그리고 오히려 그것에 반대되는 의미에서 말해지고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인간들은 듣고 또 말을 듣 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들음을 통해서는 말을 듣는 것처럼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이야기 (Rede)가 아닌 것, 즉 λόγος(로고스)를 '들을 수도, 따를 수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단편 50은 그것을 똑바로 이해했을 경우, 사람들이 이 단편에서 읽는 것과 정반대의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 단편은, 그대들은 말에 얽매여서는 안 되며, 로고스를 들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λόγος (로고스) 그리고 λέγειν(레게인)은 이미 논술함, 이야기를 의미하고 있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λόγος(로고스)의 본질이 아니기에,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서 λόγος(로고스)를 그리스어 (에페아)에, 논술함(Rede)에 반대되는 것으로 마주 세우고 있는 것이다.
이에 상응해서, 단순한 들음과 이것저것 주워들음은 진정한 들을 귀를 가지고 들음(Hörig-sein, 순명함)에 반대된다. 단순 한 들음과 이것저것 주워들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아무 생각 없이) 일상적으로 말하고 의미하는 것, 풍문(風-聞, Hören-sagen) 속으로, δόξα(독사), 가상(假像, Schein) 속으로 자신을 흩뜨려 잃어버리게 한다.
진정한 들을 귀를 지니고 있음(Hörig-sein)은 귀나 입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이것은 λόγος(로고스)가 무엇인지에, 즉 있는 것 자체의 자신의 집중(die Gesammeltheit des Seienden selbst)에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이미 순명(Hörige sind)할 수 있을 때에만 진실되게 들을 수 있다. 들을 귀를 지니고 있음, 순명 (Hörigkeit)이라는 것은 귀뿌리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누가 만일 들을 귀를 지니고 있지 않다면, 순명할 수 없다면, 따를 수 없다면, 그는 미리부터 그가 귀를 가지고 이미 들었든지 또는 지금까지 도무지 들어 본 적이 없었든지에 상관할 바 없이 λόγος(로고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그것으로의 길이 막혀 있는 것이다. 곳곳에 그의 귀를 두고 단순히 '듣기만 하는' 사람은, 그리고 이렇게 들은 것을 자신의 주위에 차고 다니는 사람은 αξύνετοι(아쉬네토이), 파악(이해, be-greifen)하지 못하는 사람이며, 이와 같은 사람으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은 사람이 어떤 양상의 사람인가에 대해서 단편 34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언제나 함께 모으는 것을 모으지 못하는 사람은 비록 듣기는 하지만 귀머거리나 마찬가지이다"(die, die das ständige Zusammen nicht zusammenbringen, sind Hörende, die den Tauben gleichen).
- Heidegger, Einführung in die Metaphysik, S. 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