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옥수수 싹이 난 사람들 Men with the Corn Sprout on Their Head (2022)
벨벳 위에 면실 자수, 480×110cm, 230×30cm, 230×230cm cotton embroidery on velvet, 480×110cm, 230×30cm, 230×30cm.
마야문명에서 옥수수는 신이 사람을 창조했던 원료이며, 자연이 내려 준 신성한 선물이었다. 옥수수는 인간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마야인들은 옥수수를 위해 노래하고 춤추며 제물을 바치는 제의를 행하였다. 바위에 새겨진 그 시대의 형상을 보면, 옥수수 줄기를 손으로 잡고 있거나 머리 사이로 옥수수 싹이 난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옥수수에 얽힌 신화를 읽고 있자니, 임신 초기에 입덧으로 고생하던 때가 떠오른다. 무조건 토해내고 먹지 않아도 구역질이 심하여 몸무게는 급격히 감소했고 당연히 영양상태는 최악이었다. 그 와중에 오로지 즐거운 마음으로 먹을 수 있었던 단 한가지가 찐 옥수수였다. 워낙 옥수수를 좋아하고 즐겨먹기도 했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뱃속 아기를 위해 먹는 건데, 그 많고 많은 음식 중에 단지 옥수수뿐이라니. 섭섭하면서도 값싸고 풍족한 옥수수라 다행이지 싶기도 했다. 말 그대로 신의 선물 같은 옥수수였다. 그러니 뱃속 아기는 옥수수가 키운 셈이다. 옥수수가 아니었으면 엄마도 뱃속 아기도 살아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몸을 갉아 아기를 잉태하는 일은 옥수수 신화와 그 이야기가 같다. 새 생명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머니가 가루가 되고 옥수수가 가루가 되고 다시 엄마가 가루가 되고 옥수수가 가루가 되는 과정에서 땅은 비옥해지고 생명은 자라난다.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다른 생명의 먹이가 되는 것은 자연의 생리이다. 자신을 희생하여 자신의 생명을 어머니라는 원천으로 되돌려 보내어 소생(embodiment)시키는 것은 생명과 재생의 완전한 순환의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벨벳 위에 자수 놓아진 글들은 고대 마야 Tzotzil Mayan 여성들에 의해 입으로 건너 내려온 시와 노래의 짧은 부분들을 가져온 것이다.
상징언어가 구체적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비로소 몸을 통해 체현되는 과정을 천 위에 수를 놓는 수행적 방식으로 이행하고 있다. 전통적 방식의 수놓기는 간접적으로나마 역사의 앞뒤 면을, 위 아래 배치를 뒤바꿔 놓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고전적이라기보다 진취적으로 보여진다. 수놓인 천이 휘날리는 상상을 하면 마치 신화의 이미지들이 살아나 움직일 것 같다. 아니, 사실은 신화의 깃발보다는 아나키의 검은 깃발을 떠올리며 검은 천 위에 자수를 놓았다.
길게 바닥까지 드리워진 블랙 벨벳의 천 위에 작가 자신이 바느질로 수놓은 것은 중미의 옥수수 여신의 서사와 이미지이다. 무늬 중에 애벌레 기호는 마치 하나의 문장을 암시하는 덩어리 문자처럼 다가오고, 여성의 신체와 연꽃 이미지는 전체적으로 벨벳의 오버그라운드와 언더그라운드를 마치 하나의 신전처럼 만드는 이유를 보여준다. 옥수수 여신의 힘이 무척 세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우리 사는 삶의 심층에 있다는 것을 이 신전-벨벳의 자수가 증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