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티도 남자친구도 물욕도 없는 삶이지만 괜찮아.
나한텐 그게 호주 스타일, 호주 라이프 그 자체다. 마치 매일 밤 내일 뭐하지, 정하고 잠드는 삶을 사는 것도 어쩌면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종종든다. 정해진 타이틀이나 뭘 꼭 해야만하는 당위성 없이 순전히 내 자유의지에 따라 내일의 것만 결정하면 된다니. 적응이 안 될만큼 심플하다.
계획이라는 건 애초에 세울 필요가 없다. 세워봤자 들어맞지 않는 계획을 뭐하러 세우나. 심지어 뭘 아는게 있어야 계획도 세우지, 이 곳에서 내가 한국인으로 살아오며 체득한 삶의 방식은 맞지 않을 때가 더 많은 것 같다. 이 곳의 방식에 따르면 더이상 긴장 속에 살지 않아도 된다. 다만 누군가는 호주가 심심하다고 했고, 어쩌면 그건 코로나바이러스 혹은 내가 예전보다 혼자 있는 걸 더 좋아하게 되어서 혹은 그냥 내가 노잼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냥 배낭 하나 메고 레깅스에 러닝화를 신고 대개는 한시간, 길게는 서너시간을 대중교통 위에서 쉬다보면 끝내주는 자연을 만날 수 있다. 이건 마치 축복, 삶이 내게 준 선물. 어쩌면 두고두고 가장 돌아오고 싶을 순간일지도 모른다고 진심으로 생각해.
정착의 상태가 아니라 짐을 늘리면 안 되고, 필요한 것만 사니까 별로 물욕도 없고 오히려 필요한 것만 갖고 누리는 감각이 살아나기도 했다.
이렇게 청량하고 탁 트인 자연 속에 있을 수 있다니. 뭐 다른거 다 필요없어진다. 맑은 공기보다 미세먼지가 더 익숙한 한국인으로서 심신이 편안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이건 지난번, 울릉공에 와서 패러글라이딩 하는거 지켜봤을 때.
언니가 맛집이라고 했던 곳에서 피쉬앤칩스도 먹었다.
내일 뭐하지에는 내일 뭐먹지나 내일은 어디서 어떤 커피를 마실까 또한 포함된다는 것. 그리고 나의 커피 취향을 재정립하고 있는 호주의 우유들. 얼죽아였던 나는 호주의 우유 덕분에 하루 한잔의 커피를 어느걸 마실지 결정하는 행복이 너무 크다. 그만큼 처음 호주에 와서 느꼈던 우유의 고소함을 잊을 수가 없다. 스킴밀크를 넣은 라떼와 풀크림밀크를 넣은 라떼는 당연히 맛이 다르고, 일반 우유 대신 아몬드밀크를 넣은 카푸치노에 설탕을 한 스푼 넣어서 마시면 또 얼마나 맛있는지 모름.
울릉공 역에서 넉넉히 15분 걸으면 나오는 카페. 2층까지 있는데, 내부 인테리어 분위기에 치여버렸다. 아쉽게도 사진을 못 찍었어서 아래에 링크함.
★★★★☆ · Cafe · 87 Crown St
사실 한국에서 기를쓰고 건강식을 먹고, 단 것/ 음료수/ 탄수화물을 자제해가며 그나마 일의 강도를 고려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으로 유지하던 몸보다는 지금 딱 8-10kg이 찐 상태다. 그러나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맛의 풍요와 선택의 자유가 너무 커서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에서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 이 모든걸 포기하는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 햇지. 맛있는 것들을 누리고 직접 음식을 해 먹으며 살이 찐 내가 오히려 건강하고 반갑기도 하다. 특히 직접 음식을 요리해서 먹는 삶을 살아보니, 간단한 것이나마 직접 해먹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살아가면서 음식의 맛이 주는 행복은 포기하고 살기에 너무 크다는 것 또한 다시금 느끼기도.
아, 내일은 또 뭘 하면서 시드니에서의 하루를 즐겨볼까. 살이 찐 나도 사랑할 수 있을만큼 그 어느때보다도 마음이 풍요롭고 정신적으로 그 어느때보다 여유로우니 (물론 항상 그런건 아니고, 경향성) 파티도 친구도 쇼핑도 술도 없어도 된다. 괜찮다. 누가 호주는 나라 자체가 재미가 없다고 그랬는데, 그 재미가 아닌 다른 행복이 있어서 재미는 좀 없어도 된다. 정말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