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스러기들 - 이르사 시구르다르도티르
Aqua Utopia|海の底で記憶を紡ぐ

Origami Around
🩵 avery cochrane 🩵

if i look back, i am lost

Love Begins
Sade Olutola

#extradirty

Jar Jar Binks Fan Club
No title available

No title available
The Stonewall Inn

pixel skylines
cherry valley forever

Andulka

blake kathryn

izzy's playlists!
One Nice Bug Per Day
macklin celebrini has autism
YOU ARE THE REASON

gracie abrams
seen from United States
seen from Mexico
seen from United States
seen from Poland
seen from Kazakhstan

seen from United States

seen from United States
seen from Iraq
seen from Indonesia
seen from Japan
seen from Bangladesh

seen from South Korea

seen from China
seen from Saudi Arabia
seen from United States

seen from Syria

seen from Malaysia

seen from Venezuela

seen from T1
seen from India
@theetoasummersday
부스러기들 - 이르사 시구르다르도티르
몸을 긋는 소녀 - 길리언 플린
남성은 항상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경제학에서도 그랬고 성 문제에서도 그랬다. 여성에게 이 자유는 금기 사항이었다. 완전히는 아닐지라도.
여성에게는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임무가 주어졌다. 여성은 출산과 생리라는 신체적 제약 조건이 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합리적일 수가 없고, 이 때문에 그들은 합리성과 정반대의 개념이라고 규정되었다.
여성의 욕망은 남성의 그것보다 늘 훨씬 혹독하게 비판받았다. 그것은 위협적이고 파괴적이며, 자연스럽지 않은 무언가로 간주됐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레베카 웨스트는 “짓밟혀도 불평하지 않는 사람이나 창녀와 나 자신을 구별 지으려 할 때, 사람들은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른다”라고 했다. 여성은 절대 남성만큼 이기적이도록 허용되지 않았다.
만일 경제학이 자기 이익의 추구를 연구하는 과학이라면 여성은 여기에 어떻게 적용될까? “남성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역할, 여성은 손상되기 쉬운 사랑을 지키는 역할이 주어졌다”가 정답이다. 그리고 이 역할 때문에 여성은 소외되었다.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한다는 것의 의미는 임신과 출산을 한다는 것일 뿐이다. 여성이 집에 머무르면서 아이가 대학에 갈 때까지 돌봐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카트리네 마르살 <잠깐 애덤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자아를 부수고 다른 사람을 껴안을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나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영혼은 “안전제일”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상처받으면서까지 누군가를 너의 삶으로 흡수한다는 것은 파멸.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쓴 영혼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 최은영 <내게 무해한 사람> p152
현재가 견디기 어려우니 희망에 매달릴 수밖에 없고 생존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 희망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가난한 자여, 핍박받고 버림받은 자여, 희망은 그대들의 것이며 신도 그대들을 위해 있나니, 희망의 무지개는 저 하늘과 하늘 사이에 걸리는 것, 그것은 미래인 것이다.
-박경리 <토지>
여성들은 강간으로 침해받은 것만이 아니라, 치욕을 당한 것이라고 교육받는다. 이들은 패배한 군인들보다 더 크게 멸시당하는데, 왜냐하면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 싸움이 불공평했기 때문이라고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기의 도덕적 기준을 위배하고, 패배를 조장했다는 점에서 비난을 받는다.
- 주디스 허먼, 트라우마
나만의 언어 발명하기. 이것이 내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까닭이다. 모든 경험은 언어에 의해 규정된다. 그런데 재테크나 피부 관리에 관심이 없고 자식 명문대 보내기를 삶의 주된 동기로 삼지 않는 나는, 가방에 학원 전단지 파일을 넣고 다니고 휴대전화에 유명 강사의 연락처가 저장된 목동 엄마들과 달리, 등단한 '여류 작가'도 아니면서 감히 읽고 쓰는 나는, 그냥 한마디로 이상한 사람이었다. 느끼고 꿈꾸고 회의하는 감수성 주체로 살아가는 여자 인간은, 있어도 없는 존재이자 이 시대에 사라지는 종족이었다. 여기 사람 있다, 는 내게도 유효한 외침이었다. 이렇게 계속 살아도 괜찮은 걸까, 정말 나는 나쁜 엄마인가.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는 크게 신경쓰이지 않았다. 다만 내가 나를 설명할 말들을 찾고 싶었다. 나를 이해할 언어를 갖고 싶었다. 뒤척임으로 썼다. 쓸 때라야 나로 살 수 있었다. 산다는 것은 언어를 갖는 일이며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을 기억했다.
-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
오직 뛰어난 인간만이 차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그것은 그 사회가 심각하게 뒤틀려 있다는 증명일 뿐이다. 모두가 예쁘기까지 한, 고소득 전문직 여성이 될 필요는 없다. 정상적인 사회가 기능해야 하는 지점은 명료하다. 커리어우먼이나 골드미스가 아니어도, 부당한 대우와 착취를 겪어서는 안 되며, 정당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합당한 해결의 과정을 거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 않아도 나는 여자입니다 p227-228 이진송>
혼자를 택한다는 건 슬픔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겠다는 용기이다. 하나의 독립된 인간으로서 내 인생을 책임지겠다는 각오이며, 스스로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겠다는 선언이다. 혹여 주변인들을 챙기느라 자기 자신을 외롭게 한 것은 아닌지, 세상의 눈치를 살피느라 정작 나를 불편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 과정이 분명하고 뚜렷하지 않을지라도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고 혼자 있어볼 것. 삶의 진실은 거기 있으니 말이다. 모든 사람과 잘 지내는 것보다 나와 잘 지내는 게 중요하다.
<혼자 있기 좋은 방>, 우지현
어떤 시절엔 사람들이 모두 같은 이유로 죽는다. ... 회복은 불가능했다. 시대는 운명을 다한 것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흔적을 추슬러 그것들을 잊지않게 만드는 건 언제나 몇몇의 개인들이며, 그들조차도 기력이 다할때가 온다.
그것이 현실이라고, 현실이 나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적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기적을 만드는 건 언제나 사람이며 그래서 결국엔 헷갈리는 것이다.
<알제리의 유령들>, 황여정
‘난 뭘 하고 싶은 걸까?’
그녀는 자문했다.
‘지금까지는 꽤 재밌게 산 것 같아. 하지만 춤추고 게임이나 하면서 남은 인생을 보낼 순 없잖아? 새 아브로 기종을 타고 비행 시합에 출전하거나 메이 컨리프 양처럼 라곤다 신모델을 시험 운전하는 일을 할 수도 있겠지. 아니면 아비시니아어를 배운다거나 말을 키울 수도 있겠고. 것도 아니면 진이나 진창 마시든가. 하지만 모르겠어. 어째 전부 시시하게만 보이니.’
‘그래, 멜버른 최고의 여탐정이 되는 거야. 그 정도면 이루기 힘든 목표잖아? 그러다 다른 일로 이어지기도 할 테고. 그렇지 않더라도 스키 시즌을 즐길 수는 있을 거야. 어쨌든 재미는 있지 않겠어?’
그 순간, 풀빛 섬광이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더니 하늘은 이내 떠오르는 태양이 이끄는 황금빛과 장밋빛으로 물들었다. 그녀는 태양에게 키스를 날리고 객실로 돌아갔다.
케리 그린우드, <코카인 블루스>
경애는 지하상가로 내려갔다. 구두칼과 좀약 그리고 귀이개를 파는 노점 앞을 지나다 턱이 조붓하고 눈이 아주 작으며 쪽을 쪄서 머리를 올린 여자의 인상이 낯익어 다시 돌아왔다. 낡은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는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다가 나른하게 하품을 했는데 아랫니가 거의 빠진 것도 눈에 들어왔다. 경애는 그 여자가 E와 만난 적이 있던 바로 그 노숙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삼년 전에 여자는 역 계단에서 구걸을 하고 있었다. E는 경애와 함께 그 앞을 지나면서 마치 중요한 비밀을 가르쳐주듯이 “아이가 있어”라고 말했다. 과연 옆을 보니 작은 이불을 덮은 아이의 발이 보였다. 경애는 그 발이 지하도의 찬 기운 속에 나와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지나가는 말로 불행하네,라고 했는데, E가 문득 경애의 팔을 잡으면서 니가 뭔데,라고 따졌다. 니가 뭔데 그렇게 말해,라고.
경애는 물건을 구경하는 척하면서 한동안 노점 앞을 서성였다. 그사이 병아리색 체육복을 입은 남자애가 노점까지 달려와 여자에게 무언가를 받아갔다. 아이는 학교에 다니는 것 같았다. 경애는 그 아이와 여자가 아니라 노점에 놓인 물건들에 관심을 두려고 노력했다. 물건들은 다 필요한 것 같기도 다 필요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하나쯤은 있어야 하는 물건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러니까 E처럼 죽은 이들에게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경애는 그 물건들이 다 필요할 것 같다가도 하나도 갖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 빠지면서 결국 그 앞을 한동안 떠나지 못했다. 그러자 여자가 아가씨, 뭐 찾아요? 하고 물었다. 내 물건 내가 다 알아. 찾아줄게요. 내가.
결국 경애가 고른 것은 작은 부채였는데, 거스름돈을 받으면서 경애는 잠깐 여자의 손을 스치듯 잡아보았다.
<경애의 마음>, 김금희
그 아이의 깊음과 얕음, 그 아이의 급격한 변화. 물론 그것들은 그저 그것으로, 깊음으로, 얕음으로, 급격한 변화로 남도록 허락되지 않았다. 물론 그것들에는 마침내 이름들이, '진단'이 부여되었다. 그 이름들은 계속 변했다. 한 예로 조울병은 OCD라고 불리는 강박신경증으로, 강박신경증은 또 다른 무엇으로 변하여 도무지 무엇이었던지 기억할 수 없었지만 어찌됐든 내가 그것을 기억할 때쯤이면 또 새로운 이름, 새로운 '진단'으로 변할 것이기 때문에 별 상관이 없었다. '진단'이란 낱말을 인용부호 안에 가둔 것은 '진단'이 '치유'는 커녕 확증되고 그리하여 강제된 장애 외에 다른 결과로 이어진 사례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의술이라는 것이 불완전한 예술임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다. 그 아이는 우울했다. 그 아이는 불안했다. 그 아이는 우울했기 때문에, 그 아이는 불안했기 때문에, 그 아이는 술을 많이 마셨다. 이 것은 자가 약물 투여라고 불렸다. 우울증 약물로서의 알코올은 주지 하는 바대로 나름의 결함들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효과적인 항우울제가 아니라고는 아무도 주장하지 않았다.
-존 디디온, <푸른밤>
여성들과 남성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을 같은 중요성으로 연기하는 무대 위에 산다. 그 연극은 두 종류의 연기자 없이는 계속될 수 없다. 그들 중 누구도 전체에 대해 더 혹은 덜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무대장치는 남성들에 의해 고안되고 색칠되고 규정된다. 남성들은 극본을 쓰고 공연을 관장하며 연기의 의미를 해석해왔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재미있고 가장 영웅적인 역할을 부여하고 여성들에게는 조역을 주었다.
자신들이 연극에 짜맞추어지는 방식에서의 차이를 알게 되면서 여성들은 역할배정에서 더 많은 평등을 요구한다. 여성들은 어떤 때는 남성들을 무대에 올리고, 어떤 때는 빠진 남성연기자를 대신한다. 엄청난 투쟁 후에 여성은 평등한 역할배정 권리를 얻어내지만, 먼저 '자격을 갖추어야만' 한다. 여성들의 '자격' 요건 또한 남성에 의해 정해져 있으며, 남성은 여성을 평가하는 심판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성을 받아들이기를 허용하거나 거부한다. 그들은 유순한 여성을 선호하고 그들이 만든 일의 내용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여성들을 선호한다. 남성들은 자신의 역할을 해석할 권리나 최악의 죄인 대본을 다시 쓸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은 누구든지 희롱하거나 배제시키거나 돌을 던짐으로써 벌을 준다.
대본, 소도구, 무대세팅, 연출을 남성이 꽉 잡고 있는 한 '평등한' 역할을 얻는 것이 자신들을 평등하게 해주는 것이 아님을 여성들이 이해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 이것을 여성들이 깨닫고, 막 사이에 혹은 연기 도중에 서로 모이고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할 때, 이 연극은 끝난다.
마치 한 편의 연극을 보듯이, 사회의 기록된 대문자 역사를 보면 수천년에 걸친 연기에 대한 이야기가 오직 남성들에 의해서만 기록되고 그들의 말로써 얘기되어 왔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들의 관심은 대부분 남성들에 관한 것이었다. 아니나다를까 그들은 여성들이 해온 연기를 알아보지 못했다. 결국 지난 50년 동안 일부 여성들은 대본을 쓰는 데 필요한 훈련을 받았다. 대본을 쓰면서 그들은 여성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더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남성 멘토들에게 잘 훈련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도 역시 남성들이 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과거에 여성들이 맡은 역할을 격상시키려는 욕망에서, 남성들이 했던 일을 한 여성들을 열심히 찾아냈다. 이렇게 보완적 역사가 탄생하였다.
여성들이 해야 하고 페미니스트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동화 속의 어린이가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아냈듯이 무대, 세트, 소도구, 연출자, 대본작가를 지목해내고 우리들간의 기본적 불평등이 이 틀 속에 놓여 있다고 폭로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것을 파괴해 버려야만 한다.
<가부장제의 창조 - 가다 러너>
“리도는 그저 땅속에 구멍을 파서 물을 채워 넣은 곳, 사람들이 때때로 찾아가 수영하다 가고 마는 곳이 아니에요. 그보다 훨씬 큰 의미가 있죠. 그 의미가 너무 커서 혹시 알아보지 못한다면 그건 그래야만 할 방식대로 눈을 사용하지 않은 탓이겠죠. 로즈메리와의 만남이 그걸 제게 가르쳐줬어요. 그리고 리도가 아니라도 도서관이든 청소년 센터든 한 남자가 평생 살아온 아파트든, 지금도 거리로 내몰리는 곳들이 있어요. 모두 신문에서 매일 다루고 있거나 아니라면 마땅히 다루어야 할 것들이죠. 그들은 모두 중요해요. 그리고 지금 괜찮지 않아요. 엄청나게 괜찮지 않다고요.”
-수영하는 여자들, 리비 페이지
어둠 속의 희망 - 레베카 솔닛
저들의 까다로움은 전면적 승리가 아닌 건 뭐든 실패라고 보는 완벽주의에서 오기 일쑤인데, 그런 전제는 처음부터 포기하거나 가능한 승리를 폄하하는 것을 손쉽게 만든다. 우린 땅 위에 산다. 땅이 하늘이 될 수는 없는 법이다. 잔인한 일은 언제나 벌어질 것이고 폭력도 언제나, 파괴도 언제나 존재할 것이다. 지금도 엄청난 참화가 자행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데 걸리는 시간 동안 열대우림 몇 에이커가 사라지고 생물 종 하나가 멸종할 것이며, 사람들은 강간, 살해당하고 가진 것을 빼앗기고 별것 아닌 이유로 죽어갈 것이다. 우린 모든 참회를 영원히 막을 수는 없지만 참화를 줄이고 불법화 하고 그 원천과 기초를 막고 허물 수는 있다. 이런 것이 승리다.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나 완벽한 세상은 결코 가능하지 않다.
카르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대답했다. 작년 여성의 날 인터넷에 페미니즘 문구와 사진을 올렸다. '나는 설거지를 하기위해 태어난 게 아냐(I was not born to wash the dishes)' 라는 당연한 문구였는데, 그 글에 대응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악성 댓글과 혐오발언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그 남성들을 대상으로 여성들은 힘겨운 설전을 벌여야만 했다. "아니, 그럼 설거지를 하려고 태어났다는 거야 뭐야." 지극히 당연한 얘기, 예컨대 '여성도 인간이다' 같은 말에조차 언짢아지는 남자들을 상대로 설명하는 일을 언제까지 계속해야할까. 카르멘의 단체가 겪은 일은 이미 우리도 수없이 반복을 보아온 종류의 것이기에 한숨이 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남자들이 화를 낸다는 건 우리가 뭔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죠." 카르멘의 말에 우리는 박장대소했다.
<유럽 낙태 여행> 우유니게, 이두루, 이민경, 정혜윤 (봄알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