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최근학기, 그러니까 2016년 2학기, 정확히 말하면 10월20일에 쓴 글이다. 고작 몇달이 지났지만 그 짧은 시간 중에도 생각이 계속 변했다. 내가 얼마나 미숙하고 배워야 할게 많은지 알수 있다.
솔직히, 대한민국 입시 시스템 아래 있는 학생들이 디자인과를 진학할때 디자인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는경우는 드물 것이다. 그래서 학과에 입학하고 첫 학기 수업을 할때 많은 이가 적지 않게 혼란스러워 한다. 나 역시 그렇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길을 잃은 정도가 더 심하다면 심했다. 신입생 시기에 난 아무 목적도 방향도 없이 떠 다니고 있었다. 그러고 있을때, 수업 시간에 디터 람스의 디자인 10계명에 대한 것을 배웠다.
"좋은 디자인은 혁신적이다. /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유용하게 한다. / 좋은 디자인은 아름답다. / 좋은 디자인은 제품을 이해하기 쉽도록 한다. / 좋은 디자인은 정직하다. / 좋은 디자인은 불필요한 관심을 끌지 않는다. / 좋은 디자인은 오래 지속된다. / 좋은 디자인은 마지막 디테일까지 철저하다. / 좋은 디자인은 환경 친화적이다. / 좋은 디자인은 할 수 있는 한 최소한으로 디자인한다."
입시 그림만 죽어라 그렸던 나에게 디자인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느끼게 한 말이다. 이 이후에 내가 완전히 바뀌거나 한건 아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나에게 무언가 작은 기준이 세워졌다. 그 기준은 나의 가장 큰 이정표가 됐고 시간이 제법 흘렀지만 아직까지 유효하다. 정직함, 명료함, 중립성, 세밀함, 간결함. 지금도 나는 이런 가치를 따라 생각하고, 또 길을 찾고 있다.
소통은 디자인의 근본 목적이다. 때문에 디자인은 대화와 같아야 한다. 겉과 속이 다른 대화, 진실되지 않은 대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때문에 나는 정직함과 명확함을 통해 소통하는 것을 추구한다. 그래서 '디자이너는 친절해야 할까?' 하는 질문에 나는 ‘그렇다’고 답한다.
이런 관점은 ‘디자인 10계명’에 기반한 것이기도 하지만 비전공자와 대중의 시선을 체감한 것이 더 큰 계기가 됐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배워야 이해할 수 있는 예술과 디자인’에 대해 의문이 있다. 함께 즐기고 향유하고자 하는 예술과 디자인이 많은 지식이 있어야 알수 있는 분야가 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납득하지 못했다. 시각 언어에 파 묻혀 살고 있는 나는 시각 언어를 인식하고 배우고 탐구하는게 익숙해 졌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런 사람들에게 ‘제대로 모르니까 이해 못한다.’라고 하거나 ‘대중을 이해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하고 받아 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느꼈다. 단지 그들은 알지 못하는것 뿐이다. 내가 그들이 예술과 디자인을 어떻게 바라 보는지 몰랐듯이 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훈계하듯이 왜 알지 못하냐고 다그칠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조금 더 보수적인 역활을 하는 디자인, 일상적인 대화처럼 삶을 채우는 디자인의 필요성을 느꼈다. 때문에 나는 디자이너로서 ‘친절함’을 계속해서 마음에 새긴다.
개인이 원칙을 가지는 것은 필요하지만, 타인에게 방식을 지나치게 요구할 수는 없다. 디자인 철학과 신념은 마치 종교와 같다. 종교는 서로 다른 신을 믿으며, 서로 다른 교리를 따른다. 하지만 각자의 다른 종교를 존중하는 이유는, 종교에서 믿고 추구하는 것은 결국 선행과 봉사, 사랑과 용서와 같은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종교에 다양한 교리가 있듯이 디자이너들은 각자의 철학을 통해 다양한 방식을 쓴다. 직접 말하거나 은유하기도 하고 명확하게 보여주거나 모호하게 숨겨 놓기도 한다. 그리고 종교의 궁극적 믿음이 비슷하듯 그런 방법론은 결국엔 소통이라는 하나의 목적으로 이어진다. ‘기독교인은 모두 태워 죽이겠다.’, ‘하느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하고 말하는 종교인을 우리는 미개하다고 한다. ‘그리드 시스템을 따르지 않으면 디자이너 자격도 없다.’, ‘시대에 뒤떨어진 디자인은 다 버려야한다.’고 말하는것 역시, 별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생각보다 흔하다. 신념이 고집이 되고, 고집이 아집이 되고, 아집이 독선이 된다. 오죽하면 경직되어 가는 모더니즘 디자인을 보며 포스트 모더니즘 디자이너들이 파시즘을 연상했겠는가. 나는 그렇게 되는 걸 피하려 한다. 융통성 없는 성격 탓에 쉽지는 않다. 말로는 ‘그래 그 말도 맞아.’ 하면서 마음 속으론 ‘그래도 도무지 좋아 할 수가 없어.’하는 말을 삼킬 때가 많다. 그래도 약간이라도 이해하려는 시도를 하면, 다른 것을 향한 관점이 조금씩 너그러워지는 걸 느낀다. 다른 것을 인정하는 건 내가 디자인을 계속 하는 한 끊임없이 노력하고 신경써야 할 일이다.
불필요함이 없는 디자인을 추구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겪는 것이 있다. 내 디자인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내가 간결한 디자인을 하려고 곁가지들을 다 쳐 내도, 내 디자인은 명확해 지지 않았다. 그냥 미완성 같아 보였다. 뭐라도 집어넣으면 나아 질수도 있는 일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우겨 넣는 일은 인지부조화를 겪게 했다. 최소한의 디자인을 추구하는데, 그대로 두면 좋아 보이지 않아 결국 이것 저것 넣어야 한다는데서 모순을 느꼈다. 그래서 한동안 내 작업은 덜 완성된 느낌으로 계속 머물러 있었다. 이렇게 시행 착오를 겪으면서 알게 된 것이 있다.
하라 켄야는 비어있는 디자인은 마치 빈 그릇과 같다고 했다. 가득 담긴 메세지를 보이는 것이 아닌, 빈 그릇을 내보여주면서 그걸 보는 수용자가 그것에 상상하고 의미를 담으며 커뮤니케이션하게 한다. 좋은 그릇을 만드는 수고는, 무언가를 채워 넣는 수고에 뒤지지 않을것이다. 최소한의 디자인이라 해서, 문제 해결을 위한 디자인 논리가 적게 적용 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난 의미 없이 공허한 것과 방법론을 통해 설계한 여백을 혼동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후로 '최소한의 디자인’을 철저히 지키는 것은 잠시 유보하기로 했다. 방법론과 논리를 세련되고 우아하게 함축시키는 것은 아직 서투르기에, 내 디자인은 자연스럽게 채워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더 많은 디자인을 공부하고 연구하면 여백을 통해 논리를 보여주는 때가 오지 않을까. 어쨋든 지금은, 비워내기 위해 채우는 것을 연습하고 있다.
여러가지 디자인을 접하고 디자인 철학이 바뀔수도 있다. 실제로 경험이 적었던 저학년 때에 비해 지금 나의 관점이 바뀌었 다는걸 느낀다. 아마 지금 보다 더 많은걸 경험하면 바뀌는 속도는 더 빠를 것이다. 그런 변화는 마치 기후와 토양의 변화에 영향을 받는 나무의 변화와 같다. 많은 디자인 작품을 경험하는 것은 나무에 비추는 햇살과 내리는 비처럼 내 '디자인 나무'의 결을 단단하거나 부드럽게, 또는 녹음을 짙고 무성하게 하거나 단풍의 색을 바꿀 것이다. 하지만 그 결실의 근원을 찾아 가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1학년때 마음속에 심어졌던 씨앗 하나, 디터 람스의 가르침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