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을 둘러싼 기억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 죽어간다. 우리는 그걸 '학살’ 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의 날씨를 잊었고, 싫은 내색을 할 때면 찡그리던 콧등의 주름이 어떤 모양으로 잡혔는지를 잊었다. 나란히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던 이층 찻집의 이름을 잊었고, 가장 아끼던 스웨터의 무늬를 잊었다. 하물며 찻집 문을 열 때면 풍기던 커피와 곰팡이와 방향제와 먼지 등의 냄새가 서로 뒤섞인 그 냄새라거나 집 근처 어두운 골목길에서 꽉 껴안고 등을 만질 때 느껴지던 스웨터의 까끌 까끌 한 촉감 같은 건 이미 오래전에 모두 잊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마침내 그 사람의 얼굴이며 목소리 마저도 잊어버리고 나면, 나만의 것이 될 수 없었던 것들로 가득했던 스무 살 그 무렵의 세계로, 우리가 애당초 바라봤던, 우리가 애당초 말을 걸었던, 그 세계 속으로 완전한 망각이 찾아온다.
*완전한 망각이란, 사랑 안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의 보존. 그러니 이 완전한 망각 속에서, 아름다워라. 그 시절들. 잊혀졌으므로 영원히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기억의 선사시대. 이제 우리에게는 그 시절의 눈이 없지. 그 시절의 귀와 입과 코가 없지. 스무 살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너무나 끔찍한 얼굴로 우린 살아가고 있는 셈이지. 한번 살았던 세계를 영원히 반복해서 살아가는 유령들처럼. 그 누구에게서도 결코 ‘학살’ 되지 않는 존재로 우리는 오래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장수하고 나서도 그 뼈와 머리카락들 오래오래 썩지 않고 튼튼하게 남아 있으리라.
*그렇게 우리는 사랑하는 세희를 잊고, 사랑하는 서연을 잊고, 이젠 우리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누군가를 잊고, 우리가 아는 다른 어떤 것, 우리가 적이라거나 환영이라거나 공포라고 불렀던 뭔가로 바뀌어가고 있을 무렵, 우리는 7번 국도로 자전거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해 봄, 우리는 카페 7번 국도의 구석자리에 앉아 대략 하루에 1,000cc씩 한 달 동안 모두 30,000cc의 생맥주와 수십 마리의 말린 바다생물들을 씹어먹으며 자전거 여행을 꿈꿨다. 꿈의 재료는 지도 위에 긴 선 하나가 바다를 스치듯이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수면안대를 찬 것처럼 우리 앞으로는 어떤 풍경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우리에게는 희망을 선물하러 찾아올 외계인도. 우리를 둘러싼 기억들을 없애줄 옛 애인도 없었으므로.
우리는 가난했고, 또 적적했다. 충분히 사랑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과 같다고 생각했으므로 그때 우리는 가고자 해도 갈 길이 없는 진퇴양난의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돌아가고 싶다고 말을 하기에는 청춘이 너무 아까웠고 새로운 인생을 원하기에는 용기가 부족했다. 아깝고 부족하고, 아깝고 부족하고 그렇게 해가 뜨고 해가 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