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움의 시대를 이기는 방법
http://newspeppermint.com/2018/11/05/m-envy/
“어느 선에서 만족해야 하는가”
나는 어느 선에서야 만족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occasionally sub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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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움의 시대를 이기는 방법
http://newspeppermint.com/2018/11/05/m-envy/
“어느 선에서 만족해야 하는가”
나는 어느 선에서야 만족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NIKE + Manvsmachine + Zelig sound
https://mvsm.com/
나이키 에어맥스 2017 광고
"Go lighter, go longer." 더 가볍게, 더 멀리"
감각의 시각화. 공기에 대한 탐국
-송곳
안 그럴 거라고 장담하지 말자.
사진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보정이 필수.
오랜만에 참신한 시도의 영화를 봤다.
얼마전에 개봉한 서치.
SNS가 유행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해놓은 점도 그렇고, 아무 의미없는 것들인줄 알았던 것들을 잘 이용해서 스토리에 풀어내는 점도 그렇고 연출력이 대단하다.
https://www.manamine.net/category/movie(Article:article/1/rR1bTHOScLA5MHpgE5wr)
위의 글을 보면 정말 디테일 한 부분까지 신경쓴 것을 알 수 있는데, 느끼는 바가 많다.
이런 노력도 없이 만들어지는 요즘 영화들을 보면 너무 답답할 때가 많다.
"상황이 달라지면 내 생각도 바뀝니다."
"상황이 달라지면 내 생각도 바뀝니다." - John Maynard Keynes
위대한 경제학자 케인즈(J. M. Keynes)를 싫어하는 어떤 사람이 그가 자주 말을 바꾼다고 비판했습니다. 이 비판에 대해 케인즈는 다음과 같이 응수했는데, 두고두고 인용되는 명언이 되었습니다. “상황이 달라지면 내 생각도 바뀝니다. 선생님은 어떠신가요?” (When the facts change, I change my mind. What do you do, sir?“ 자신이 어떤 철석같은 신념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상황이 바뀌어 그것이 적절치 않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버려야 마땅한 일입니다.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잘못된 신념에 고집스레 집착하는 것은 현명치 못한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사고의 일관성보다는 유연성이 더욱 적절한 덕목이 될 테니까요. 이와 같은 사고의 유연성은 평범한 개인에게도 중요한 덕목일 테지만, 특히 정책 담당자에게는 더욱 필수적인 덕목입니다. 특정한 목표를 지향하고 도입된 제도가 실제로는 기대한 것과 다른 효과를 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와 다른 효과가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성격의 것일 경우도 많습니다. 이때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그 잘못된 정책을 그대로 밀어붙이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일단 시행된 정책이라도 그것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판단이 내려지면 지체없이 수정해 더 큰 비용이 발생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케인즈가 말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사고의 유연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최근 내가 쓴 글 하나가 우리 사회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임대주택등록제가 투기를 조장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내 지적이 정책에 영향을 미쳤나 봅니다. 정책 담당자가 내 글을 인용하며 임대주택등록제의 수정이 필요하다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솔직히 말해 난 그 제도가 언제 처음 도입되었는지 잘 모릅니다. 다만 이명박근혜 정부 때도 그 정책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주로 부자에게 유리한 정책을 밀어붙이던 정부였는지라, 임대주택등록제도 집 많이 갖고 있는 부자들을 위한 정책의 일환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가난한 세입자들을 위한 정책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그 내용을 보면 부자들을 위한 정책임이 분명했습니다. 만약 진정으로 세입자들을 위한 정책을 생각했다면 단지 임대사업자로 등록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렇게 엄청난 세제상 혜택을 주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종합부동산세 문제도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이명박근혜 정부는 늘 다주택자의 수호성자처럼 행동했고 임대주택등록제도 그런 틀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 제도를 대폭 축소 내지 폐지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내 기대와는 달리 그 정책을 계속 밀어붙이는 게 아닙니까? 최근 주택가격 급등이 문제가 되자 정부가 그 대응책으로 내놓은 것들 중에 이것도 포함되어 있더군요. 논리적으로 따져보면 주택가격 급등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조장할 가능성이 있는 그 정책을 대응책이라고 제시하는 데 어이가 없었습니다. 내가 최근 문제된 그 글을 쓰게 된 배경이 바로 그것입니다. 정부가 뒤늦게 임대주택등록제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수정에 팔 걷고 나선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언론, 특히 보수언론이 정책의 일관성이 결여되었다는 점을 들어 비판의 칼을 갈고 있네요. 물론 정부가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잘못된 정책을 고집스레 밀고 나가는 것만큼 미련한 짓은 없습니다. 더군다나 정부는 이미 임대사업자로 등록한 사람의 기득권은 인정하고 새로 등록하는 사람에 대해서만 세제상 혜택을 축소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정부의 약속을 믿고 임대사업자로 등록한 사람 중에 손해를 보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셈인데 구태여 정책의 일관성을 들고 나올 필요가 어디 있는지 모를 일이군요. 정부가 기득권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나온다면 그때는 정책의 일관성이 문제될 수 있지만요. 일부 언론에서는 정부가 ‘오락가락하고’ 있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내 눈에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습니다. ‘오락가락’이라는 표현이 정당화되려면 정부가 이렇게 고쳤다 저렇게 고쳤다 줏대없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그건 절대 아니지 않습니까? 단지 종래의 임대주택등록제에 문제가 있으니 시정하겠다는 건데, 뭐가 오락가락입니까? ‘내로남불’이란 말을 또다시 머리에 떠올리게 됩니다. 나는 임대주택등록제가 갖는 문제점을 미처 몰랐다고 고백한 정부의 용기에 오히려 박수를 쳐줘야 한다고 믿습니다. 웬만한 정부라면 이왕 그렇게 된 것 계속 밀고 나가자는 식의 만용을 부리기 십상이고, 그렇게 솔직한 고백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국민의 이익은 안중에 없고 자신의 체면이나 지키겠다는 생각을 하기가 십상이니까요. 위대한 경제학자 케인즈도 상황이 변화하면 생각이 달라지는 게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임대주택등록제의 문제점이 드러난 이상 과거에 연연해 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문제가 된 부분은 당연히 시정되어야 마땅하고, 그대로 묻어 버리는 게 오히려 졸렬한 일입니다. 새로이 임대사업자로 등록하는 사람에게 적용대상을 한정시키겠다는 정부의 보완책은 정책의 일관성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전혀 없습니다. 정책의 일관성을 들먹거리면서 잘못된 정책을 수정하는 데까지 딴죽을 거는 것은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그 보완책을 하루라도 빨리 실천에 옮기라고 독려해야 마땅한 상황이라고 믿습니다.
출처 : http://jkl123.com/sub5_1.htm?table=board1&st=view&page=1&id=18402&limit=&keykind=&keyword=&bo_class=
-유연한 사고가 정말 어려운데, 이 글을 보고 반성해본다. 요즘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떤 일이나 상황 속에서 고집을, 원칙을 세우려고 한다. 물론 그게 나쁜것은 아니지만, 상황 속에서 유연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치즈 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
치즈 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 - 무라카미 하루키
우리들은 그 땅을 '삼각지대'라 불렀다. 그 이외에 어떻게 불러야 좋을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것은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정확하게 삼각형 모양을 한 땅이었던 것이다. 나와 그녀는 그런 땅 위에 살았었다. 1973년 인지 1974년인지 그 즈음의 이야기다. '삼각지대'라고는 하지만, 흔히 말하는 것처럼 델타의 모습을 상상하면 곤란하다. 우리가 살았던 '삼각지대'는 좀더 가늘고 길며, 쐐기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먼저 둥근 치즈 케이크를 생각해 주면 좋겠다. 그 다음 식칼로 그 케이크를 12등분 해 주면 좋겠다. 요컨대 시계의 문자판 같은 모습으로 자르면 될것이다. 그 결과로 당연하게 각도가 30도인 케이크 조각이 12개 만들어진다. 그 하나를 접시에 올려 놓고, 홍차라도 홀짝 거리면서 가만히 바라보면 된다. 그것이 - 그 끝이 날카롭고 가늘고 긴 케이크 조각이 – 우리들의 '삼각지대'의 정확한 모습인 것이다. 어떻게 그런 부자연스러운 땅이 만들어지게 되었느냐고 당신은 물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묻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상관 없다. 어쨌거나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거기에 오래 산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잘 몰랐다. 그것은 아주 아주 오래 전부터 삼각형이었고, 지금도 삼각형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삼각형일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 이외에는 아는 것이 없었다. 그 지방 토박이들은 어느 쪽인가 하면 그 '삼각지대'에 대해서 별로 이야기 하고 싶어하지도 않고, 생각하기도 싫어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어째서 '삼각지대'가 그런 모습으로- 귀 뒤에 난 사마귀처럼- 푸대접을 당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잘 몰랐다. 아마도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삼각지대'의 양 옆으로는 두 종류의 철도 노선이 지나고 있었다. 하나는 국철이고 하나는 사철이다. 그 두 개의 철로가 얼마간 나란히 가다가 그 쐐기의 끝을 분기점으로 해서 마치 찢기듯이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남과 북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전망이었다. '삼각지대'의 끝에서 전철이 오고 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파도를 가르고 바다 위를 헤쳐나가는 구축함의 사령탑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거주 상태나 거주의 적합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삼각지대'는 터무니없고 형편없는 장소였다. 그것은 그렇다. 여하튼 두 개의 철로에 빈틈없이 끼어 있기 때문에 시끄럽지 않을 수가 없다. 현관문을 열면 눈 앞에 전철이 달리고 있고, 뒷 창문을 열면 거기는 거기대로 다른 전철이 눈앞을 달리고 있다. 눈앞이라는 표현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실제로 전철을 탄 승객과 눈이 마주쳐 가볍게 인사를 할 정도의 거리에서 전철이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전철이 지나가 버리고 나면 조용해지지 않느냐고 당신은 말할지도 모른다. 아마 대개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 역시 실제로 이사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마지막 전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여객 열차가 오전 한 시 전에 모든 운행을 마치고 나면, 이번에는 야간 화물 열차가 그 뒤를 이었다. 그리고 새벽녘까지 화물 열차가 계속해서 지나가고 나면 다음날의 여객수송이 시작된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계속해서 되풀이 되는 것이다. 자-알 한다. 우리가 일부러 그런 장소를 골라서 살았던 이유는 첫째도, 둘째도 집세가 쌌기 때문이다. 단독 주택으로 방이 세 개 있었고, 욕실이 붙어 있었으며, 작은 뜨락까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 한 칸짜리 아파트와 집세가 거의 비슷했다. 단독 주택이기 때문에 고양이도 키울 수 있었다. 마치 우리를 위해서 마련해 놓은 듯한 집이었다. 우리들은 갓 결혼했고, 자만할 일은 아니지만 기네스북에 실려도 이상할 것이 하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 우리들은 역 앞에 복덕방에 붙어 있는 종이에서 그 셋집을 발견했다. 조건과 집세와 집의 구조만을 본다면, 그 집은 경이적인 발굴이었던 것이다. "이만저만 싼 게 아냐."
머리가 벗겨진 복덕방 주인이 말했다.
"상당히 시끄럽기는 하지만, 그 정도 참을 수 있다면 보물을 파냈다고 말할 수 있지."
"하여튼 가 볼 수 있을까요?"
나는 물었다. "좋아. 그런데 댁들끼리 가면 안 될까? 난 거기에 가면 머리가 아파서..." 그는 열쇠를 빌려 주었고, 집까지의 약도를 그려주었다. 기분좋은 복덕방 아저씨였다. 역에서 보면 '삼각지대'는 매우 가깝게 보인다. 그렇지만 실제로 걸어보면 거기에 도착할 때까지 무서울 정도의 많은 시간이 걸린다. 철로를 한참 돌아서 육교를 건너고, 구중중한 언덕길을 내려가고 올라가고 해야 겨우 뒷 쪽에서 '삼각지대'로 돌아 들어가게 된다. 주위에 상점이나 그 비슷한 것은 전혀 없다. 빼어날 정도로 초라하다. 나와 그녀는 '삼각지대'의 끝에 외따로 세워져 있는 집 속으로 들어가 한 시간 정도 거기서 멍하게 앉아 있었다. 그 사이에 꽤나 많은 전철이 집 양쪽으로 지나다녔다. 특급이 통과하면 유리창이 덜컹덜컹 소리를 냈다. 전철이 통과할 때에는 서로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을 때 전철이 지나가면 우리들은 입을 다물고 전철이 완전히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조용해져서 우리들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곧바로 다음 전철이 왔다. 이런 것을 일컬어 커뮤니케이션의 분단이라고 할까 단절이라고 할까. 소음을 별개로 한다면 집의 분위기 자체는 상당히 괜찮았다. 만든 지는 확실히 오래 되었고, 전체적으로 흠이 있었지만 방이며 뒷마루 등은 느낌이 좋았다. 창으로 비쳐드는 봄볕이 방바닥 위에 작은 사각형 양지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살았던 적이 있는 집과 닮았다. "빌리도록 하지."
나는 말했다. "분명히 시끄럽기는 하지만 어떻게 익숙해지겠지" "당신이 그렇게 말한다면......그것으로 좋아요."
그녀는 말했다. "여기서 이렇게 가만히 있으면 마치 내가 결혼해서 가정을 가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하지만 정말로 결혼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
나는 말했다. 우리들은 복덕방으로 돌아가 집을 빌리겠다고 말했다. "시끄럽지가 않았어?" 머리가 벗겨진 복덕방 아저씨가 물었다. "시끄럽기야 하지만 어떻게 익숙해지겠죠." 나는 말했다. 복덕방 주인은 안경을 벗어서 헝겊으로 안경을 닦고, 찻잔 속의 차를 한 모금 훌쩍이고는 안경을 다시 쓰고 내 얼굴을 보았다. "하긴 젊으니까." 그는 말했다. "예." 나는 말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임대계약을 맺었다. 이사는 친구의 작은 소형차 한 대면 충분했다. 이불과 의류와 식기와 전기 스탠드와 몇 권의 책과 한 마리의 고양이.
그것이 우리들의 전재산이었다. 라디오가 없으니 당연히 텔레비젼도 없었다. 세탁기도 냉장고도 식탁도 가스 난로도 전화도 전기 청소기도 토스터도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들은 그 정도로 가난했다. 따라서 이사라고 해봐야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돈이 없으면 인생은 매우 간단하다. 이사를 도와주러 온 친구는 두 개의 철로에 끼어 있는 우리들의 새로운 주거지를 보고 매우 놀란 모양이었다. 그는 이사를 마치자 우리들을 향해서 무어라고 말했지만, 마침 특급열차가 달려왔기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뭐라고 말했어?" "정말로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감동한 듯이 그는 말했다. 결국 우리들은 그 집에서 2년간 살았다. 두려울 정도로 창이나 문의 여닫이가 나쁜 집이어서 외풍이 들어오지 않는 곳이 없었다. 덕분에 여름에는 쾌적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그 대신 겨울은 지옥 이었다. 난로를 살 돈도 없었기 때문에 해가 지면 나와 그녀와 고양이는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가 말 그대로 서로 껴안고 잤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부엌의 개수대가 얼어 있는 것도 늘상 있는 일이었다. 겨울이 끝나자 봄이 왔다. 봄은 멋있는 계절이었다. 봄이 오자 나도 그녀도 고양이도 안심했다. 4월에는 며칠간 철도 회사의 파업이 있었다. 파업을 했을 때 우리는 정말 행복했다. 전철은 하루종일 단 한대도 철로 위를 달리지 않았다. 나와 그녀는 고양이를 안고 철로로 내려가, 양지에 앉아 볕을 쬐었다. 마치 호수 바닥에 앉아있는 것 같이 조용했다. 우리들은 젊었고, 결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으며 태양빛은 공짜였다. 나는 지금도 '가난'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그 삼각형의 가늘고 긴 땅이 생각난다. 지금 그 집에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 살고 있을까?
치즈 케이크 모양을 한 나의 가난 - 무라카미 하루키
>사실 삶이란게 많은게 필요없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간다.
그리고 그 상황이 어떻든,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게 행복해지는 법이다.
행복이란 정말 상대적인 것이다.
엄청난 시간이 걸렸을 것 같은 작업.
대단하다. 정말
-볼수록 감탄이 나오는, 스파이크존즈 애플홈팟광고
https://tv.naver.com/v/1307609
https://tv.naver.com/v/1307610
하이퍼리얼리즘의 의의
-처음에는 맛있는 커피가 먼저고 SNS가 나중이였으나, 지금은 SNS를 위해서 커피를 먹으러 다니는 현실. 가상세계가 일상을 따라가는게 아니라 거꾸로 가상세계를 일상이 따라가고 있음.
-사진을 그냥 찍지 왜 그리지?라는 질문에, 사진이 있으니 하이퍼리얼리티도 있는 것이라는 답변. 뭐가 가상이고 뭐가 실재인지 한번이라도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하이퍼리얼리즘의 의의
-더 깊게 들어가면 현실 사회에서도 이런 것은 찾아볼 수 있음. 이 사회 자체가 하나의 하이퍼리얼리즘일 수 있음. 공동체는 사람들이 각자가 행복해지려고 만들어진 것인데, 행복이 아니라 공동체의 제도나 권력을 중시하게 되면서 그것에 억압받게 된다.
-스티븐 프라이 : 곰은 곰이고, 개구리는 개구리다. 하지만 사람은 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흉내내기 위해서 남이 하란데로 하다가 죽을까?
-나라는 예술작품을 공산품으로 평생 만들다가 죽지말자. 예술품은 아니더라도 한정판은 되자. 내가 원본이고, 내가 실재이니까.
>그냥 단순히 그림실력을 뽐내는건가? 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깊은 철학이 있는지 몰랐다. 결론은 사진인지 그림인지 뭐가 중요해? 그건 중요하지 않아. 그냥 내가 느끼는데로, 나데로 살자 라는 것. 감명깊은데 어려운 이 느낌은 뭘까?
어떤 애플 광고보다, 이 광고가 마음에 든다.
나중에 내 아이를 가진다면, 해보고 싶은 작업 중 하나.
http://www.vogue.co.kr/2017/12/08/141801/?_C_=11
사실 처음에는 한국계 미국인 학생이 영상을 찍은줄 알았는데,
‘2018년 기대되는 아티스트’에 뽑힌 유명한 아티스트라니 충격.
위의 음악에서 ‘그게아니야~’라는 부문을 흑인들이 따라 부른다니 또 충격.
참 음악들이 오묘하고, 대단하기도 하다.
베네딕트 컴퍼비치의 홍보영상.
무엇보다도 정말 발음이 대단하다.
1995년에 개봉했던 서극의 칼이라는 작품.
옛날 영화인 만큼 어떤 CG나 특수효과가 없지만, 지금봐도 박진감이 넘친다.
요즘은 카메라 기술이 발달한 만큼, 영화 속에 이것저것 기교가 너무 많이 들어간다.
특히 흐름에 맞지 않는 효과는 보기엔 화려할지 모르나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한다.
결국, 뭐든지 기본에 충실한 것이 좋다는 말이다.
이런 영화가 참 그립다.
도서명 :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저자 : 무라카미 하루키
머리말 : ‘달린다’는 것은 하루키에게 문학과 삶을 향한 치열한 도전이었다!
별점 : ★★★☆
목적
항상 무엇을 하기전에 버릇이 있다. 관련된 책을 찾아보는 것. 그리고 그것을 하기위한 합리화를 하는것. 이전부터 보고 싶었는데, 러닝을 시작하게 된 이후에 보게되었다.
한줄감상평
달리기로 말하는 하루키의 인생,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
요약 및 감상평 -하루키가 바라는 묘비명에서 보듯, 달리기는 그의 인생이며 가치관이다.
-달리기 일지, 그 순간의 느낌을 기록으로 남겨두었던 것을 토대로 에세이를 썼다고 한다. 나도! -자신의 인생의 가치관을, 달리기에 비유하여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하루키의 이름이야 유명한 걸 알지만, 또한 상실의 시대를 읽었지만 제대로 기억이 나지 않을만큼 나에게 있어서 대단한 작가는 아니다. (물론 제대로 안읽기도 했지만) 하지만 자신을 장거리 러너로써 한걸음씩 꾸준히 지속해나가는 그 모습이 ‘인간 하루키’로써 존경할만한 사람으로 느껴진다.
-달리기의 좋은점은, 신발만 있으면 된다. 그리고 결국은 자신과의 경쟁이라는 부분.
-나에게 달리기란 무엇이며, 어떤 의미일까? 왜 달리는가.
>달릴 때 느껴지는 무력감, 그것이 현재의 나와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안힘들 때까지 달리고 싶다. 헉헉대며 단거리를 달려 모든 체력을 소모하기보다는, 장거리를 여유있게 달려 성취감을 느끼고 싶다. 달리기에 있어서도, 인생에 있어서도.
발췌
-자신이 흥미를 지닌 분야의 일을 자신에게 맞는 페이스로, 자신이 좋아하는 방법으로 추구해나가면 지식이나 기술을 지극히 효율적으로 몸에 익힐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령 번역 기술도 그렇게 해서 나만의 스타일로, 내 돈을 들여가면서 하나씩 익혀 나갔다. 그래서 어느 정도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시간도 걸렸고 시행착오도 거듭했지만, 그런 만큼 배운 것은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었다.
-내 생각에는, 정말로 젊은 시기를 별도로 치면, 인생에는 아무래도 우선순위라는 것이 필요하다.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배분해가야 할 것인가 하는 순번을 매기는 것이다. 어느 나이까지 그와 같은 시스템을 자기 안에 확실하게 확립해놓지 않으면, 인생은 초점을 잃고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소설을 쓰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소설가로서 인터뷰를 하다 보면, “소설가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소설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자질은 말할 나위도 없이 재능이다. 문학적 재능이 전혀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소설가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필요한 자질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전제 조건이다. 연료가 전혀 없으면 아무리 좋은 자동차도 달릴 수 없다. 그러나 재능의 문제점은 대부분의 경우, 그 양이나 질을 그 소유가가 잘 컨트롤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양이 부족하니까 약간 양을 늘려보고 싶다고 생각해도, 절약해서 조금씩 꺼내 가능한 오래 쓰려고 해도 그렇게 생각대로는 되지 않는다. 재능이라는 것은 당사자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터져 나오고 싶을 때 저절로 분출해버리고, 나올 만큼 다 나와 고갈되면 그것으로 책 한권이 끝나는 것이다. 슈베르트나 모차르트같이, 또는 어느 시인이나 록 싱어처럼 풍부한 재능을 단기간에 기세 좋게 소진하고, 드라마틱하게 요절해서 아름다운 전설이 되는 삶도 확실히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에게는 별로 참고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재능 다음으로 소설가에게 중요한 자질이 무엇인가 질문을 받는다면 주저 없이 집중력을 꼽는다. 자신이 지니는 한정된 양의 재능을 필요한 한 곳에 집약해서 쏟아 붓는 능력. 그것이 없으면 중요한 일은 아무것도 달성할 수 없다. 그리고 이 힘을 유효하게 쓰면 재능의 부족이나 쏠림 현상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 나는 평소 하루 3시간이나 4시간 아침나절에 집중해서 일을 한다. 책상에 앉아서 내가 쓰고 있는 일에만 의식을 집중한다. 다른 일은 아무것도 생각하지도, 보지도 않는다. 설사 풍부한 재능이 있더라도, 아무리 머릿속에 소설적인 아이디어가 충만해 있다고 하더라도, 예를 들어 지독한 충치의 통증이 계속된다면 그 작가는 아마 아무것도 쓸 수 없지 않을까? 집중력이 격심한 통증에 의해서 방해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집중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은, 그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집중력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지속력이다. 하루에 3시간이나 4시간 의식을 집중해서 집필할 수 있었다고 해도, 일주일 동안 계속하니 피로에 지쳐버렸다고 해서는 긴 작품을 쓸 수 없다. 반년이나 1년이나 2년간 매일의 집중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힘이, 소설가에게는-적어도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에게는-요구된다. 호흡법으로 비유해보면, 집중하는 것이 그저 가만히 깊게 숨을 참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숨을 지속한다는 것은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호흡해가는 요령을 터득하는 작업이다. 그 두 가지 호흡의 밸런스가 잡혀 있지 않으면 몇 년 동안에 걸쳐 전업 작가로서 소설을 계속 써나가기 어렵다. 호흡을 멈추었다 이었다 하면서도 계속할 것. 이와 같은 능력(집중력과 지속력)은 고맙게도 재능의 경우와 달라서, 트레이닝에 따라 후천적으로 획득할 수 있고, 그 자질을 향상시켜 나갈 수도 있다. 매일 책상 앞에 앉아서 의식을 한 곳에 집중하는 훈련을 계속하면, 집중력과 지속력은 자연히 몸에 배게 된다. 이것은 앞서 쓴 근육의 훈련 과정과 비슷하다. 매일 쉬지 않고 계속 써나가며 의식을 집중해 일을 하는 것이, 자기라는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라는 정보를 신체 시스템에 계속해서 전하고 확실하게 기억시켜 놓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씩 그 한계치를 끌려올려 간다.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조금씩, 그 수치를 살짝 올려간다. 이것은 매일 조깅을 계속함으로써 근육을 강화하고 러너로서의 체형을 만들어가는 것과 같은 종류의 작업이다. 자극하고 지속한다. 또 자극하고 지속한다. 물론 이 작업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만큼의 보답은 있다.
-세상에는 때때로 매일 달리고 있는 사람을 보고, “그렇게까지 해서 오래 살고 싶을까”하고 비웃듯이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이지만 오래 살고 싶어서 달리고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설령 오래 살지 않아도 좋으니 적어도 살아 있는 동안은 온전한 인생을 보내고 싶다’라는 생각으로 달리고 있는 사람이 수적으로 훨씬 많지 않을까 하는 느낌이 든다. 같은 10년이라고 해도, 멍하게 사는 10년보다는 확실한 목적을 지니고 생동감 있게 사는 10년 쪽이, 당연한 일이지만 훨씬 바람직하고, 달리는 것은 확실히 그러한 목적을 도와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주어진 개개인의 한계 속에서 조금이라도 효과적으로 자기를 연소시켜 가는 일, 그것이 달리기의 본질이며, 그것은 또 사는 것의(그리고 나에게 있어서는 글 쓰는 것의)메타포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도 확실히 ‘장거리형’ 체질이다. 나는 매일 달리기 시작하면서부터 맥박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긴 거리를 달린다고 하는 기능에 맞춰 맥박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긴 거리를 달린다고 하는 기능에 맞춰 신체가 맥박 수를 조정한 것이다. 처음부터 맥박이 빠르고 그것이 거리를 달려감에 따라 점점 올라간다면, 심장은 바로 파열해버린다. ··· 거리를 달리고 있는 사람이 아마추어냐 프로냐 하는 것은 바로 구별할 수 있다. 헉헉, 하면서 짧은 숨을 가쁘게 쉬고 있는 것은 초보자이고, 조용히 규칙적으로 호흡하는 것은 베테랑이다. 그들의 심장은 천천히, 생각에 잠기면서 서로의 호흡의 리듬을 들으며, 서로의 시간의 흐름을 느끼게 된다. 마치 작가들이 서로 상대의 어법을 교감하는 것처럼.
-소설을 쓴다는 것이 불건전한 작업이라는 주장에 나는 기본적으로 찬성하고 싶다. 우리가 소설을 쓰려고 할 때, 다시 말해 문장을 사용해 이야기를 꾸며 나가려고 할 때는 인간 존재의 근본에 있는 독소와 같은 것이 좋든 싫든 추출되어 표면으로 나온다. 작가는 다소간 그런 독소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위험을 인지해서 솜씨 좋게 처리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독소가 개재되지 않고 참된 의미의 창조 행위를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예술 행위라고 하는 것은 애당초 성립부터 불건전한 반사회적 요소를 내포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니만큼 작가(예술가) 중에는 실생활 그 자체의 레벨부터 퇴폐적으로 전락하고, 또는 반사회적인 의상을 걸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것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할까. 그와 같은 자세를 결코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생각이지만 오랫동안 직업적으로 소설을 써나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와 같은 위험한(어느 경우에는 목숨을 내놓는 경우가 되기도 한다)체내의 독서에 대항할 수 있는 자기 면역 시스템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좀 더 강한 독소를 바르고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하면 좀 더 힘 있는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자기 면역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오랜 기간에 걸쳐 유지해 나가려면 강력한 에너지가 필요하게 된다. ··· 참으로 불건전한 것을 다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은 되도록 건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이 나의 행동 목표이다. 다시 말하면 불건전한 영혼은 또 건전한 육체를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자랑스럽다고 할 만큼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그 나름의 성취감 같은 것이 이제야 생각난 듯이 가슴속에 북받쳐 오른다. 그것은 ‘위험스러운 일을 자진해서 맡아 그것을 어떻게든 극복해 나갈 만한 힘이 내 안에도 아직 있었구나’하는 개인적인 기쁨이며 안도감이었다. 기쁨보다는 안도감 쪽이 오히려 강했는지도 모른다. 몸속에 견고하게 묶여 있던 매듭 같은 것이 점점 느슨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것이 내 안에 존재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로서는 잘 알 수 없는 것이다. 어떠한 이유와 경위로서 ‘러너스 블루’가 내 몸에 배어 있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와 경위로서 지금 그것이 희미해지고 사라지려 하고 있는지. 그 설명은 아직 잘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어쩌면 결국에는 이렇게 단정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아마 인생이 아닐까, 라고. 우리는 아마 그것을 그저 있는 그대로 송두리째, 이유도 모른 채 그 어떤 경위에도 아랑곳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라고. 세금이나 조수의 간만, 존 레논의 죽음과 월드컵의 오심과 마찬가지로. ···기록이 문제가 아니다. 지금에 와서는 아무리 노력을 해본들, 아마도 젊은 날과 똑같이 달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별로 유쾌한 일이라고는 말하지 어렵지만, 그것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일인 것이 분명하다. 나에게 역할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에도 역할이 있다. 그리고 시간은 나같은 사람보다는 훨씬 충실하게, 훨씬 정직하게 그 직무를 다하고 있다. 아무튼 시간은,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생겨났을 때부터(도대체 그것이 언제였을까?)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전진해오지 않았는가. 그리고 요절을 면한 사람에게는 그 특전으로 확실하게 늙어간다고 하는 고마운 권리가 주어진다. 육체의 감퇴라고 하는 여예가 기다리고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익숙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중요한 것은 시간과의 경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만큼의 충족감을 가지고 42킬로를 완주할 수 있는가, 얼마만큼 자기 자신을 즐길 수 있는 가, 아마도 그것이 이제부터 앞으로의 큰 의미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 아닐까. 수치로 나타나지 않는 것을 나는 즐기며 평가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까지와는 약간 다른 성취의 긍지를 모색해가게 될 것이다.
-각자의 집으로,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다음 레이스에 대비해 각자의 장소에서 (아마) 이제까지와 같이 묵묵히 연습을 계속해간다. 그런 인생을 옆에서 바라보면-혹은 훨씬 높은데서 내려다보면- 별다른 의미도 없는 더없이 무익한 것으로서, 또는 매우 효율이 좋지 않은 것으로서 비쳐진다고 해도, 또한 어쩔수 없는 일이 아닌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가령 그것이 실제로 바닥에 작은 구멍이 뚫린 낡은 냄비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은 허망한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적어도 노력을 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효능이 있든 없든, 멋이 있든 없든, 결국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대부분의 경우, 눈에는 보이지 않는(그러나 마음으로는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진정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때때로 효율이 나쁜 행위를 통해서만이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공허한 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결코 어리석은 행위는 아닐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실감으로써, 그리고 경험칙으로써. 그런 효율은 나쁘지만 의미 있는 행위의 사이클을 언제까지나 현실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나도 알지 못한다. 그래도 여기까지 어떻게 해서든 질리지 않고 끈질기게 해왔기 때문에, 어쨌든 계속할 수 있는 한 해보려고 생각한다. 장거리 레이스가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많든 적든, 좋든 나쁘든) 키워주고 만들어왔던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한 나는 앞으로 장거리 레이스적인 것과 더불어 생활을 하고, 함께 나이를 먹어가게 될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이치가 닿는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겠지만-인생일 것이다. 아니,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다른 선택을 할 만한 여지도 없는 것이다.···어쨌든 눈앞에 있는 과제를 붙잡고 힘을 다해서 그 일들을 하나하나 이루어 나간다. 한 발 한 발 보폭에 의식을 집중한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동시에 되도록 긴 범위로 만사를 생각하고, 되도록 멀리 풍경을 보자고 마음에 새겨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장거리 러너인 것이다.개개의 기록도, 순위도, 겉모습도,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가도, 모두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와 같은 러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결승점을 내 다리로 확실하게 완주해가는 것이다. 혼신의 힘을 다했다, 참을 수 있는 한 참았다고 나 나름대로 납득하는 것에 있다. 거기에 있는 실패나 기쁨에서, 구체적인-어떠한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되도록 구체적으로-교훈을 배워 나가는 것에 있다. 그리고 시간과 세월을 들여, 그와 같은 레이스를 하나씩 하나씩 쌓아가서 최종적으로 자신 나름으로 충분히 납들하는 그 어딘가의 장소에 근접하는 것이다. 만약 내 묘비명 같은 것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그 문구를 내가 선택하는게 가능하다면, 이렇게 써넣고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작가(그리고 러너)
1949~20**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이것이 지금 내가 바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