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에서 들리는 한국말
생각보다 많진 않지만, 이곳 베를린에서도 한국말이 들린다. 베를리너 주립 도서관으로 가던 중, 한국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도서관 뒤켠 계단에 앉아 있는 걸 보았다.
“너를 완전히 사랑했어? 지랄하지 말라 그래.” 라는 한 마디가 들렸다.
그래, ‘지랄’의 감정은 독일어도 영어도 어떻게 담을 수 없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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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에서 들리는 한국말
생각보다 많진 않지만, 이곳 베를린에서도 한국말이 들린다. 베를리너 주립 도서관으로 가던 중, 한국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여자가 도서관 뒤켠 계단에 앉아 있는 걸 보았다.
“너를 완전히 사랑했어? 지랄하지 말라 그래.” 라는 한 마디가 들렸다.
그래, ‘지랄’의 감정은 독일어도 영어도 어떻게 담을 수 없을 거야.
할머니의 눈물샘
“초상집에 가야 하는데, 가면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어떡해요.”
“네?”
약국에서 약을 받으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들리던 대화였다. 할머니는 초조한 목소리로 약을 주는 점원에게 물었다. 점원은 조그맣게 실소하고선, 글쎄요... 라며 할머니를 안심시킬만한 대답은 주지 못했다. 이어서 가운을 입은 약사가 줄줄이 약봉지를 들고 나타났다.
“아니, 이비인후과에서 눈물 흘리면 안 된다고 했는데, 초상이 생겨서... 초상집. 가면 눈물이 날 텐데...”
나 또한 정말 그럴 땐 어떡해야 하나, 궁금해졌다. 약사가 말했다.
“그건 의사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저도 잘... 그런데 그건 괜찮을 거예요. 자연스럽게 자극돼서 나오는 눈물이니까.”
할머니는 약봉지를 받고 등을 돌리고 나갔다. 나도 약봉지를 받고 계산을 한 뒤 할머니와 같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나에게 이비인후과를 갔다 오느냐 묻는 할머니의 얼굴을 가까이 보았다. 눈물인지 이비인후과에서 발라준 약인지 모르겠지만 눈가가 촉촉히 젖어 있었다. 앞 상황을 다 들었기에 그 모습은 어쩐지 우는 쪽에 가까웠다.
별 것 아닌 질문이었을 수도 있는데, 할머니의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쓸쓸하게 들린다. 눈물이 날 텐데, 울면 안 되는데, 어떡하나.
재이와 함께 제주도. 재이는 숲에서 주운 나뭇가지를 갖고 다니며 비자림의 붉은 흙 바닥 여기저기에 그림을 그렸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 흔들리는 소리가 크고 고요하게 들렸는데, 그럴 때마다 모든 동작을 멈추고 허공을 바라보는 조카가 귀엽고 그 순간은 정말 아름다웠다. 협재 해수욕장에서 나는 파도에 쓸려온 미역 비슷한 걸 주워다 머리카락을 만들었다.
볼더링
처음 붙었을 때 ‘이건 내 문제가 아니다. 안 되겠다.’
두어번 붙었을 때 ‘좀 스쳤다!’
서너번 붙었을 때 ‘오, 좀 가능성이 있으려나?’
n번 붙는 중에 ‘할 수 있겠다. 계속 하자.’
신발을 고쳐 신고, 초크칠도 하고, 쉬기도 하면서 다시 붙었을 때 ‘드디어 잡았다! 자, 집중해서 끝까지 가자.’
도무지 될 것처럼 보이지 않던 게 점점 가능성있는 것처럼 바뀌는 이 과정이 볼더링의 엄청난 매력이다. 오늘 이 흐름대로 계속 한 문제에 포기하지 않고 붙었다. 마침내 성공!
잘 다녀오세요
국가, 공공기관 등에서 친절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너무 말이 빠르거나 잘 모르는 단어가 쏟아져서, 전화가 끝났는데도 어딘가 해결되지 않은 느낌을 받기가 부지기수.
복잡해 보이는 행정처리를 하기 위해 공단에 전화를 걸었다. 이런 저런 설명을 듣고, 또 확실하게 어떻게 하면 되는지 나는 되묻고. 전화를 받은 직원의 목소리는 책에 쓰인 설명을 줄줄 읽는 톤이 아니라 말 그대로 ‘통화’를 한다는 느낌을 줬다.
“.... 그렇게 하시면 되고요, 그거 보내시고 다시 한 번 전화 주세요. 그리고 이따가 전화 통화에서 제가 얘기 못 드릴 수도 있을까봐...”
또 새로운 정보를 받아 적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말. “해외 잘 다녀오세요.”
공공기관도 이렇게 친절할 수 있구나. 나는 전화를 끊고 웃으며 복잡해 보였던 일들을 수월하게 마쳤다. 이런 저런 일들로 정신 없던 중에 아주 넉넉하고 편안해졌던 말 한마디.
티눈
얼마 전부터 왼쪽 두 번째 발가락에 티눈 비슷한 게 생겼다. 암벽화를 신다 보니 그러려니 했다. 양쪽 엄지 발가락도 따봉을 하는 것처럼 동그랗게 부어 올라와 있는데 아프진 않아서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이 티눈 비슷한 건 좀 달랐다. 자꾸 커지는 것 같더니 일요일에 운동을 할 땐 이따금 통증이 전해져 조그만 홀드를 밟기 어려웠다.
티눈이나 사마귀를 잘 진료한다는 피부과를 찾아 가 진료를 받고 오는 길이다. 조금 융기돼 있어서 표면을 깎아 보고 사마귀인지, 일반적인 티눈인지 판단해 보자고 하신다. 물사마귀는 전염성이 있어서 치료가 복잡해질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치료대에 올라가 발을 올리니 조금 긴장이 됐다. 의사 선생님은 통조림캔의 뚜껑을 따듯 면도칼로 그 부분의 표면을 도려냈다. 다행히 진단 결과는 단순한 티눈. 의사 선생님은 바로 레이저를 들고 그 부분을 치료했다. 살이 지져지는 냄새와 약간의 알싸함이 느껴졌다.
다시 신발을 신고 진료실로 들어가 설명을 들었다. “티눈이 생긴 게 클라이밍이 꼭 주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걸을 때나 다른 신발을 신을 때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을 거예요. 혜원 씨의 두 번째 발가락이 좀 길어서 구부릴 때도 더 위로 튀어 나오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 치료가 상황을 호전시키는 거지, 원인을 제거할 순 없어요. 또 압박을 주면 티눈이 생길 거예요. 어쨌든 김자인 선수처럼 세계적인 선수가 되기엔 혜원 씨의 신체적 조건은 좋지 않다는 거죠.”
아, 선생님. 나의 미래까지 점쳐주시다니. 너무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해 주셨어...
-
외식이 잦았던 일주일이었다. 평소보다 많이 먹었다. 위가 콕콕 쑤신다.
나이키와 임블리
나이키 우먼 스니커즈 라인에선 왜 갖고 싶은 게 이리도 없나 생각해 본다.
색.
편견에 맞서며, 너라는 위대함을 믿어 라고 말하는 나이키인데, 여성용 운동화만 놓인 벽에는 여전히 벚꽃색 에어포스와 반짝이는 펄이 들어간 에어맥스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다양성.
남성용 스니커즈에 비해 고를 수 있는 신발 종류가 너무 적다. 여성용 제품이 남성용에 비해 월등히 많은 매장이 있다면, 꼭 찾아가 뭐라도 사고 싶다.
민아와 함께 나이키 매장을 구경하고 이해할 수 없다며 밖으로 나왔다. 보는 눈이 비슷해서 덜 외로웠다. 나이키와 카시나, 반스, 와일드혹스를 쭉 둘러보고 단순한 호기심에 임블리를 들어가 봤다. 귀여운 이름으로 무장된 제품 네임택을 보고,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얼른 네임택의 등을 돌렸다. 다시 한 번, 우린 여기 더 오래 있으면 안 될 사람인마냥 부리나케 나왔다.
클라이밍과 윤리
“저는 지금 방학중이에요.” 암장에서 만난 여자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늘 차분해 보이는 모습과 안정되고 느린 말투를 봐선 어린 학생은 아닐 것 같고, 대학원생일까? 지금 백수로 쉬고 있는 상태를 그렇게 표현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많이 궁금한 것도 아니었어서 더 질문은 하지 않았다.
나는 요새 낮에 운동을 한다. 여러 사람이 우르르 몰리는 저녁 시간과 달리 낮 시간은 늘 한적하고 고요하다. 늘 정해진 시간에 같은 사람이 온다. 그 분과도 여러 번 마주치면서 인사를 주고 받았다.
매트에 앉아 쉬던 중, 서로 어떻게 지금 이 시간에 암장에서 운동을 할 수 있는지 얘기가 나왔다. 전에 이야기한 ‘방학’이 더 구체화된 것이다.
“저는 선생님이에요. 고등학교에서 윤리를 가르쳐요. 원래 중학교에서 도덕을 가르쳐서, 도덕은 쉬운데, 이제 윤리를 해야 돼요..” 내가 알던 고등학교 윤리 선생님의 모습은 한껏 올드하기도 하며 엄숙하고 근엄하다. 그러니까 알록달록한 홀드를 보며, 신나는 음악이 흐르는 암장에 앉아, 그라미치 바지를 입고 암벽을 탈 모습은 아닌 것이다.
윤리 선생님은 개학이 시작되고 3월 부터는 저녁 때만 올 수 있다고 했다. 앞으로 자주 못 보겠지만, 학교에서도 암장에서도 늘 화이팅하길!
Tear-jerking
지난 수업 때 'tear-jerking'이라는 단어를 배웠다. 눈물이라는 단어와 갑자기 움직이거나 꿈틀거리며 혹은 경련하는 의미의 jerk가 합쳐져 '눈물을 짜내는' 뜻이 된 단어다.
영화나 드라마, 다큐멘터리를 보다 보면, 이 tear-jerking한 순간이 있다. 구슬픈 피아노 선율이 흐르고, '자, 지금부터 휴지를 준비하십시오.'라고 말하는 듯한 포인트. 나는 정작 그런 장면에서 눈물이 안 나온다. 여기서 울어야 한다며, 마음 놓고 우리 다같이 펑펑 울자며 마음 속을 후벼 파면, 괜한 기시감이 든다. 곧이어, 그 슬픈 흐름에 한발 빗겨서서 건조하게 바라보는 관객이 된다.
그런데 tear-jerking보다 더 싫은 건 'laugh-jerking'이다. 웃음 포인트를 미리 알고 온 관객들과 유행어가 쏟아져 나오는 스크린 앞에서 나처럼 감정이 예열되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무던한 관객은 이 상황이 조금 민망하다.
영화를 보고 극장에서 나왔을 때 어디서 많이 웃었는지, 어디서 눈물이 빵 터졌는지 얘기해 보면 각자의 순간은 다 다르다. 역시 jerking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딘지 호들갑스럽다. 덤덤하게 웃고, 가만히 좀 오랫동안 낙담할 수도 있지.
*'laugh-jerking'이란 단어는 사전에 없다.
헌신
어제 본 영화는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유레카>. 그리고 오늘은 나딘 라바키 감독의 <가버나움>을 봤다. 두 영화가 맞닿는 부분은 물리적으로 없다. 그러나 내 머릿속에서는 이 두 영화가 '헌신'으로 묶인다. <유레카>에서 사와이 상은 코즈에와 나오키를 위해, <가버나움>에서 자인은 사하르와 요나스를 위해 살아간다. 헌신의 대상은 이들이 살아남기 위한 버팀목이자 책임감이다. 사와이 상은 이런 말을 한다. "오직 남을 위해서만 살 수도 있을까?' 그리고 자인은 이렇게 말했다.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어요. 존중받고 사랑받고 싶었다고요."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헌신한다는 건 대체 뭘까. 이기적인 내가 그 감정을 터득하고 받아들이며 실현할 수 있을까?
축사
친구는 곧 결혼할 친구의 축사를 준비하며 우리에게 어떤지 미리 들려줬다. 함께 머리를 맞대며 어색한 어미,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부분들을 고치고 다듬었다. 누군가 받을 축사를 미리 읽어 보는 시간.
달리기
오랜만에 저녁 달리기를 했다. 일요일 저녁은 내가 뛰기 좋아하는 시간. 머릿속이 가벼워지고 생각이 유연해진다.
LOVE LIFE BUILDING, 2019
2018
올해의 커피 : 교토 위켄더스 카페에서 마신 아이스 라떼. 참기름 맛이 났다.
올해의 식사 : 미성옥 설렁탕, 오쏘 파스타
올해의 과일 : 아보카도
올해의 운동 : 클라이밍
올해의 사건 : 오사카에서 겪은 지진
올해의 결심 : 퇴사와 워킹홀리데이
올해의 책 : 허수경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호프 자런 <랩 걸>
올해의 영화 : <팬텀 스레드>, <하나 그리고 둘>
올해의 드라마 : <This is us> 시즌2
올해의 라디오 : <FM 영화음악 정은채입니다>
올해의 선물 : 조카
올해의 공연 : 공중캠프에서 본 ZOOT16
잘 가, 2018!
Nerve
긴장은 악몽을 만드나. 대사관 방문 예약을 이른 시간으로 해둔 터라 일찍 일어나야 했다. 전날 밤, 자기 직전까지 알람 소리를 못 듣고 놓치는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라는 공상을 하며 잠이 들었다. 꿈을 꿨다. 노트북 겉면이 균열이 생기듯 갈라진 꿈이었다. 꿈에서는 원래 얼토당토 않는 일이 벌어지니 그렇다 치자, 그런데 그 순간 눈이 번쩍 떠진 것이다. 얼마 뒤 곧 다시 잠에 빠졌지만, 왜 그런 꿈을 꿨는지.
오늘 대사관에 방문해서 비자 신청에 필요한 서류를 제출했다.
Flat white
플랫화이트를 보면 작년 겨울에 갔던 호주가 생각난다. 매일 커피를 마셨고, 호주에 왔으니 라떼보단 플랫화이트 였다. 멜버른의 선선한 공기, 시드니의 바닷바람과 모래사장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 나의 플랫화이트 한 잔엔 이 모든 것들이 커피와 함께 담겨있다. 그러고 보니 작년 오늘, 나는 멜버른의 여름에 도착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