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 | 노혜경
이미 당신은 문밖에서 저문다 굳센 어깨가 허물어지고 있다
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 내가 가고 있다고
- “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 실천문학사, 2015
Aqua Utopia|海の底で記憶を紡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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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 | 노혜경
이미 당신은 문밖에서 저문다 굳센 어깨가 허물어지고 있다
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 내가 가고 있다고
- “말하라, 어두워지기 전에”, 실천문학사, 2015
자네는 글쓰기의 장벽을 말했는데, 누구나 그런 장벽에 부닥치지. 대체로 글이 잘 안 나가는 것은 작가의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야.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자신의 주제에 대하여 엉뚱한 접근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지. 그러면서 나는 예전에 어떤 작품을 쓰다가 내가 겪은 난관을 그에게 말해 주었다. 그 작품은 2부로 나누어진 일종의 회고록 같은 것이었다. 그 회고록의 1부는 1인칭으로 썼다. 나의 얘기가 1부보다 더 많이 나오는 2부 역시 1인칭으로 써나갔으나 점점 더 결과물에 불만이 쌓여 가다가 마침내 글을 멈추게 되었다. 그 중단 기간은 여러 달 계속되었는데 힘들고 번뇌스러운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해결안이 떠올랐다. 나는 나의 접근 방법이 틀렸음을 알았다. 나 자신을 1인칭으로 서술함으로써, 나는 나 자신을 질식시켰고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내가 찾고 있던 것을 찾는 게 불가능해졌다.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떨어트릴 필요가 있었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나 자신과 나의 주제(바로 나 자신) 사이에 약간의 공간을 두는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2부의 시작으로 다시 돌아가 3인칭으로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되었고 이런 자그마한 시점 변화에 따른 거리 덕분에 나는 그 책을 끝낼 수가 있었다. 어쩌면 자네도 이와 유사한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말했다. 자네가 주제에 너무 가까이 있는 게 아닐까. 그 소재가 너무 고민스럽고 또 너무 개인적인 것이어서 1인칭 시점으로는 적절한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런 새로운 접근 방법이 자네를 격려하여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을까?
폴 오스터, “보이지 않는” p. 95-96
똑같은 제복을 입혀 외형적으로는 단일 집단의 구성원으로 통일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를 들여다보면 한국 사회의 갈등 구조가 그대로 녹아 있다. 학벌 갈등, 성별 갈등, 세대 갈등, 지역 갈등도 있지만 가장 큰 갈등은 빈부 갈등이다. 이를 관리해야 할 부사관이나 소대장도 병사들과 같은 또래의 경험 없는 20대로 그 자신이 갈등의 당사자가 되기도 한다. 관심병사만 문제가 아니라 ‘관심 간부’도 있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군대 내 약자나 부적응자를 상대로 하는 신종 ‘왕따 놀이’가 판을 친다. 기수문화라면 자다가도 일어난다는...
갈 길이 멀다는 걸 다시금 절감한다. 하지만 좌절하지도 포기하지도 말자. 자칫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의 하나는 개탄하는 것으로 자신의 윤리적 우월감을 확인하면서 자기만족에 머무르는 데 있다. 실상 세상이 혐오스럽다고 개탄하는 일은 쉬운 일이다. 개탄을 넘어 분노할 줄 알아야 하고 분노를 넘어 참여하고 연대하고 설득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이 기존의 생각을 고집하기 때문에 설득하기 어렵고 그래서 모두 설득하기를 포기한 채 살아간다면, 세상의 변화를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을까. 의미 있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다시금 되새기자.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게 아니라 어려운 길이므로 우리가 가야 하는 것이다.
갈 길이 멀지만 포기하지 말자 (홍세화, 한겨레 2014.6.20)
독일에서 온 놀이터 디자이너 귄터 벨치히의 초청 강연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일흔살이 넘은 ‘어른사람’인 벨치히는 ‘어린사람’의 싱싱한 감각을 가진 노인이었다. … 벨치히에게 한 시민이 물었다. ‘노인 세대와 아이들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놀이터가 가능하지 않을까? 벨치히는 정색을 하며 깐깐하게 답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아이들과 있으면 늘 가르치려고 듭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나는 알고, 너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구도 속에서 아이들은 자유롭게 놀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놀 때는 어른 없이 아이들끼리 놀아야 합니다.” 아, 맞다. 나도 어렸을 때 ‘우리’만의 비밀동굴을 만들어 놀곤 했지! 벨치히의 대답은 특히 한국의 정서를 고려할 때 너무나 적확하지 않은가.
놀이터 디자인 (김선우, 한겨레 2014.6.19)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면 영화 속에 그려진 노년은 현실이라기보다는 상상된 노년에 더 가깝다. 그 노인들은 상상의 공동체 속 인물들이다. 100세를 산 알란은 사건과 이야기로 가득 찬 한 세기를 보낸 역사의 산증인이다. 그는 창문을 넘을 만큼 건강한 무릎을 100세가 되도록 유지하고 있다. 정신의 온전함은 말할 것도 없다. 65세가 된 젭에게도 건강이나 경제적 문제는 없다. 교수인 그레고리우스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차표를 발견하고 불현듯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적어도 그가 매일 복용해야 하는 약을 끼고 살지 않기 때문이다. 낯선 곳에 가서도 당황하지 않을 지력과 체력이 있기 때문이다. 작가와 감독의 생물학적 나이가 상상적 허구로서의 노년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다만 상상적 허구로 그려낸 그 노년이 지나치게 투명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알랭 바디우가 에서 인용했던 말을 은유적으로 차용해보자면 “괴로움 없이 늙기, 참 쉬워요”쯤 돼 보인다. 투명한 노년엔 질병도, 가난도, 외로움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일탈과 쾌락, 삶의 진정함만을 문제 삼는다. 영화 속에서 노년은 투명하고 완만하게 묘사된다. 그들의 노년엔 형이상학적 괴로움만 있다. 여유가 선사하는, 모두가 바라는 우아한 노년일 테다. 즐거움이 결락된 채 고통만 남은 노년도 일면적이다. 하지만 이질적인 요소를 모두 빼버린 노년도 인공적이긴 마찬가지이다. 사실 노년이야말로 허락하고 싶지 않던 부정성과 함께해야만 하는 시기이다. 뒤늦게 범칙금 통지서를 받듯 젊음을 빌미로 버려둔 생의 이면들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도 노년기이다. 감춰 두었던 근원적 균열과 두려움 즉, 우리는 언젠가 죽게 되리라는 것, 변형되고 소멸되리라는 사실을 마주하게 되는 시기, 그때가 바로 노년기이니 말이다. 부정성을 없앤 투명하고 밝은 노년기는 매력적인 상품이다. 하지만 상상적 허구는 달콤한 환상에 불과하다. 부정성과 투명성이 함께하는 노년, 두렵지만 우리는 두 가지 모두를 보아야 한다.
상상적 허구, 상품이 된 노년 (강유정, 경향신문 2014.6.19)
1986년 독일 함부르크 남쪽 외곽도시 하르부르그의 작은 광장에 파시즘에 대한 저항을 기념하기 위해 조각가 요헨 게르츠의 디자인으로 홀로코스트 기념탑이 세워졌다. 사방 1m 높이 12m의 단순한 형태로 설계된 이 탑은 놀랍게도 매년 2m씩 땅속으로 침하하여 사라지게 되어 있었다. 시장으로 가는 번잡한 곳에 세운 이 탑 옆에는 작은 게시판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나치시대에 당했던 기억들을 이 탑의 표면에 써줄 것을 하르부르그 시민들에게 당부하는 글이 쓰여 있었다. 지나는 시민들은 파시즘으로부터 받았던 박해와 고통을 낙서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모든 슬픈 기억들이 그 투박한 탑 위에 새겨지면서 탑의 표면은 분노, 슬픔, 고통의 글들로 뒤덮였다. 그러고는 그 고통들이 그들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땅속으로 파묻히는 듯, 탑은 매년 2m씩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 1993년 마침내 세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사라지는 기념탑. 작가는, 불의에 대항하는 것은 탑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어야 한다고 했다. 인공의 구조물은 결국은 무너질 수밖에 없으며, 영원한 것은 우리가 그때 거기에 함께 있었다는 것, 그 기억만이 진실하다는 것이다. 세월호의 참극이 이제 마무리 단계로 나가는 듯하여 나는 불안하다. 마지막 실종자까지 찾고, 몇 사람을 처벌하는 적당한 절차를 거치면 이윽고 기념비를 세울 게다. 그리고 그 탑에다 우리가 안아야 하는 죄의 부채를 모두 던지고 노랑 리본을 뗄 게다. 그러곤 잊을 게다. 안된다. 세월호의 비극을 기념하는 인공의 구조물을 세워서는 안된다. 우리의 가슴에 저마다 세우고 새기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이런 참극이 다시는 이 땅에 일어나지 않는다.
‘불의에 항거하는 것은 기념탑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여야 한다’ (승효상, 경향신문 2014.6.19)
몇년 전 미국에 있을 때의 일이다. 한국 쪽이 주최하는 콘퍼런스에 초청되어 간 일이 있었다. 정부의 실세 고위인사가 인사말을 하는 귀빈으로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는 행사였다. … 그런데 행사시간이 되어 가는데도 그 고위인사가 나타나지 않았다. … 거의 30분을 지각한 그 인사는 별로 미안해하지도 않고 기다리던 귀빈들과 일일이 악수를 한 뒤 행사가 지체되고 있는데도 앉아서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담소를 나눴다. 그리고 잠시 후 지루하게 행사 시작을 기다리던 청중 앞에 나가 형식적인 축하의 인사말을 한 뒤 귀빈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또 다음 일정 때문에 바쁘다”며 일찍 떠나버렸다. 행사의 실질적인 내용인 강연이나 토론에는 전혀 참가하지 않은 것이다. 그 인사가 떠난 뒤 다른 귀빈들도 뒤따라 빠져나갔다. 당시 나는 한국이 참으로 대단한 ‘의전사회’가 됐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한시간여의 ‘의전적인’ 행사 동안 업계의 현안 등 실질적인 얘기는 전혀 오가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비위를 맞추는 공허한 덕담만 오갔다. 한국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과도한 의전문화를 없애자고 제언하고 싶다. 쓸데없는 의전에 소비하는 시간을 줄이면 그 시간에 사색하고 실질적인 대화를 하고 보고서를 깊이있게 읽고 토론할 수 있다. 행사 진행자들이 높은 사람이 아닌 일반 참석자들을 위해서 더 많은 배려를 하고 내실있는 시간으로 만들 수 있다.
의전사회 (임정욱, 에스티마의 인터넷이야기 2014.5.8)
그럼 도대체 어떤 나라들이 출산율이 낮은 것일까? 크게 보아 소득수준이 올라가면 출산율이 낮아지는 경향이 있는데, 일정한 소득수준을 넘어선 나라들 사이에서는 문화와 정책의 차이에 의해 커다란 편차가 나타난다. 우리보다 출산율이 낮은 나라들은 싱가포르, 마카오, 대만, 홍콩으로서 이들이 모두 동아시아의 부유한 경제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사회복지가 부실하여 아이 낳아 기르기가 부담스럽고, 여성차별 때문에 출산과 자아실현을 동시에 이루기 어려운 나라들이다. 젊은 여성들이 출산파업으로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출산파업과 일본의 교훈 (유종일, 한겨레 2014.6.17)
주택시장에 대출을 풀겠다는 해법은 완전히 잘못된 진단에서 나온 위험한 결론이다. 성공하기도 어렵고 혹시 성공하더라도 더 큰 재앙을 부를 가능성이 높은 대책이다. 부동산시장이 살아나려면 실수요자가 늘어야 한다. 현재 집이 없는 세입자와 청년 신혼부부 등이 구매에 나서야 한다. 그런데 지금 이들이 집을 사지 않는 이유는 돈을 빌릴 수 없어서가 아니다. 빌린 돈을 갚을 만큼 충분히 벌 수 없어서다. 이 정책이 성공하려면 결국 사람들의 투기심에 불을 질러야 한다. 자신의 능력에 견줘 무리한 대출을 받아 집을 사도록 해야 한다. … 결국 주택가격이 치솟으면서 가계대출은 빠르게 늘어나게 된다. 당장은 경기가 살아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런데 글로벌 금융위기 뒤 경제전문가들은 정확히 이런 상황이 경제위기의 징후라고 지적한다. 주민 국제통화기금(IMF) 부총재는 … 최근 콘퍼런스에서 부동산과 대출 활황이 동시에 일어난 23개 나라 중 21개가 금융위기를 맞았다는 국제통화기금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또 최근 일어난 50여건의 금융위기 가운데 3분의 2 이상이 부동산시장 급등 뒤 급락이 이어지면서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실제 가치보다 지나치게 오른 가격이 다시 떨어지면서 대출받은 이들을 파산시키게 되고, 이게 금융위기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정말 부동산시장을 통해 내수를 활성화하고 싶다면, 대출이 아니라 소득을 늘려 차곡차곡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맞다. 주민 부총재의 연구에서도 부동산은 비슷하게 활황이었지만 대출은 늘지 않았던 7개 국가 중 대부분인 5개 국가가 위기를 맞지 않았다. 근로소득자의 실질임금 정체상태가 왜 이어지는지를 들여다보고 해법을 내보는 게 좋은 출발점일 것 같다.
최경환 위기 (이원재, 한겨레 2014.6.18)
다시금 대한민국을 긍정할 여지를 찾는다면, 부와 권력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 여태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그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냥 살고 있는 정도가 아니다. 정부와 국회가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유가족들은 진도와 제주 해상교통관제센터(VTS) 교신내용과 해경이 촬영한 구조 동영상에 대해 법원에 증거보전 신청을 했고, 최근 VTS 교신내용을 확보했다. 또 생존 학생들과 구조작업에 나섰던 잠수사, 어민 등에 대한 면담도 진행하고 있다. 억울하게 간 아이들의 죽음을 헛되게 만들지 않겠다는, 더 이상 대형참사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이분들이 ‘살아 있는 국민’이시다. 유가족과 함께 실천하는 분들도 계시다. 이분들에게서 ‘국민 공동체(commonwealth)’로서의 국가는 가능하겠다는 희망을 얻는다. 정치적 질서로서의 국가를 새롭게 만들 힘도 느낄 수 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두 달, 아직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누가 진정 좋은 국가를 만들려고 하는지는 드러나고 있다. 슬퍼하고 아파하는 와중에도 이렇게 세월호 모멘텀의 중핵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망가진 국가, 살아있는 국민 (김윤철, 경향신문 2014.6.18)
“공부를 잘한다”는 의미를 복잡하게 해석할 필요는 없다. 우리 일상언어의 가장 평범한 의미체계를 정직하게 밝히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그것은 “학교 시험 점수가 높다”는 뜻이다. … “학교 시험 점수가 높 다”는 것은 대학입시에 유리하다는 뜻이고, 대학입시에 유리하다는 것은 서울의 몇몇 일류대학에 입학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우리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생각하고 저 현묘한 허공에 무한히 펼쳐진 갤럭시를 생각할 때, “공부”가 겨우 요따위 밴댕이 콧구멍만한 서울의 시공에 집약된다는 것은 감내하기 어려운 위선이요 치졸함이건만, 우리 5천만 동포의 현실적 가치관은 공부의 다른 의미를 허용하지 않는다. “工”은 “功”의 약자이고, “夫”는 “扶”의 약자이다. “工夫”는 “功扶”를 의미한다. 무엇인가를 열심히 도와서(扶) 공(功)을 성취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성공한다”는 말도 단순히 “출세한다”는 뜻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공을 성취한다”는 뜻이다. “공을 이룬다”(成功)는 말을 신체의 단련을 통하여 어떤 경지를 성취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한국인의 다양한 무술적 성취야말로 공부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다. 교육이란 축적해 나가는 과정, 즉 덕(德)의 측면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축적이란 시간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즉 교육이란 시간의 예술이다. 이것은 교육의 모든 주체가 철저히 시간성에 복속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육에는 “선험적 자아”는 부재한 것이다. 경이란 우리가 여기서 말한 “몸의 공부”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천명이 사라진, 이 지상에 던져진 고독한 인간이 스스로의 자각에 의하여 스스로의 주체성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Process)인 것이다. … 신유학의 독특한 용어로서는 일차적으로 “주일무적”(主一無適)의 의미가 된다. 그것은 마음의 상태가 하나에 전념하여 흐트러짐이 없는 것이다. 경은 현대심리학에서 말하는 “어텐션”(attention)으로 환치될 수 있는데, 그것은 곧 “집중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 다시 말해서 집중하는 마음의 상태가 경(敬)인 것이다. 이러한 경의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공부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공부는 몸(Mom)을 전제로 한다. 몸이란 정신(Mind)과 육체(Body)의 이분법적 분할을 거부하는 인격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공부란 몸, 그 인격 전체를 닦는 것이니, 그것이 곧 “수신”(修身)이다. 공부는 몸의 디시플린을 의미하는 것이다. 몸의 단련이란 몸의 다양한 기능의 민주적 균형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어느 부분의 기능도 그 탁월함(아레떼)에 도달했을 때 가치상의 서열을 부여할 수 없다. … 어떠한 경우에도 “몸”이라는 우주의 총체적인 조화로운 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된다. 일어나고, 세수하고, 밥 먹고, 걷고, 생활하고, 독서하고, 놀이하고, 쉬고, 잠자는 모든 일상적 행위가 경(敬)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그 진지함 속에 개인과 사회와 우주의 도덕성이 내재한다는 것을 교육의 원리로서 자각해야 한다. 자녀에게 성 모랄을 가르치려고 애쓰기보다는 자기 방을 깔끔하게 정돈하고 매사에 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을 스스로 공부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몸의 모랄을 깨닫게 하는 더 유용한 도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서구적 자유주의의 파탄을 넘어서서 우리 민족의 유구한 일상적 규율의 원리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공부란 몸, 그 인격 전체를 닦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 한겨레 2014.6.18)
대다수 학생들은 좋은 삶을 행복한 삶이라고 답한다. 그럼 다시 무엇이 행복이냐고 물어본다. 여기에서 학생들의 반응은 반반 정도로 갈린다. 한쪽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삶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나머지 반은 그런 삶이 진짜 행복이지만 그건 이상적인 것이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답한다.
다시 그들에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는 것이 혹시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억압되고 종속된 ‘노예의 삶’은 아닌지 물어보면 대다수 학생은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어떤 학생들은 “아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합니까. 자기 좋아서 하는 것을 하면 행복한 거죠. 너무 피곤해요”라고 대놓고 말하기도 한다.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이 좋은 삶인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힘이 결여되어 있다. 바로 질문에 질문을 이어가는 힘이다. 좋은 삶에서 행복으로, 행복에서 자유로, 딱 3단계만 넘어가도 짜증이 나고 질문을 이어가는 걸 포기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충분히 시간을 들여 생각하고 점검하는 것이 아니라 대충 그렇다고 믿고 있는 것에 판단을 맡겨버린다. 충분히 점검해보지 않고 그렇다고 믿고 그냥 ‘고고싱’ 하는 것이다.
지난 학기에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확실히 깨달았어요. 생각만큼 피곤한 게 없어요. 그냥 살래요.” 이 학생의 말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간명하게 드러낸다. ‘무사유’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이 생각하는 것을 싫어해서라거나 어떤 개인의 ‘게으름’과 같은 특성 때문이 아니다. 조금이라도 충분히 생각하려 하면 시간 낭비라고 질책한다. 빨리 답을 찾아야 하고 한번 찾은 답을 절대적인 답이라 믿고 미친 듯이 달려야 한다.
— “대충 그렇다고 믿고 고고싱?”, 엄기호, 시사인
가장 걱정하던 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만큼 우리를 더 자유롭게 만드는 일은 찾기 힘듭니다.
22살에 당신이 정한 진로계획은 32살이나 42살에도 그대로이진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꿈은 끊임없이 진화합니다.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그 방향을 바꾸어나가지요.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이상향에 도달하는 것에 실패함으로써 우리는 결국 스스로가 누구인지 정의하게 되고, 그 실패가 우리를 특별한 존재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쉽지 않겠지만 그 실패를 받아들이고 잘 다루기만 한다면 실패는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2000년에 저는 졸업생들에게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말라고 그랬고 저는 아직도 그 말을 믿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저는 실패를 두려워하든 말든 실망스러운 일들은 생길 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멋진 점은, 그 실망을 통해 스스로를 명확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되며 그로부터 나 자신에 대한 강한 신념과 남들과는 다른 독창성이 함께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졸업식에서 "너의 꿈을 쫓아라"만큼 진부한 말은 없겠지요. 저는 여러분이 지금 자신의 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든지 그 꿈은 아마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제 알겠다. 노무현이 왜 그를 위해 눈물 흘렸는지.
그리고 또 이제야 알겠다. 인간 안희정이 어떤 사람인지.
모든 역사는 현대사다. 오늘 여기 있는 나를 빼놓고 역사를 바라볼 수는 없다. 역사는 결국 나라는 실존에 의하여 해석되는 것이다. 나는 현대사의 삶이다. 그런데, 우리는 놀라웁게도 현대사에 무지하다. 조선왕조가 어떻게 망했는지, 일본 제국주의가 어떻게 우리나라를 침탈했는지, 우리민족이 어떻게 처절하고도 찬란한 저항을 전개했는지, 왜 우리나라가 해방과 동시에 두 동강이 나버렸는지, 그리고 해방 후에도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희생되어야 하는지. 민주의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 했는데, 얼마나 더 많은 피를 흘려야 할 것인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하여 나는 석연한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내가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우리의 무지가 대부분 은폐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남북의 분단이 이렇게 엄청난 역사의 은폐를 초래할 줄이야. 독립운동만 해도 남에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계열은 물론, 임시정부의 활동까지도 은폐시켰다. 이승만 구미에 맞지 않는 역사는 은폐되기 마련이었다. 북에서도 동북항일연군 내의 김일성이 주도하는 소수부대 활약상 이외의 다양한 계파의 항일운동이나 빨치산 운동은 은폐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우리 국민 의식 속에는 엄청난 양의 역사적 사실이 무지 속으로 덮여질 수밖에 없었다.
EBS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 - 1부 피아골의 들국화
그는 그렇게 많은 것을 남겨 주었는데, 나는 도대체 하이다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쓰쿠루는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 친구의 내면에 과연 무엇을 남길 수 있었을까?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