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말 재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러 사정으로 어제에야 가까스로 볼 수 있었다.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추운 날씨에 영화 티켓보다 비싼 주차료를 지불하고서야 간신히...
때로는 그보다 더한 노력을 기울여서라도 꼭 봐야 하는 영화가 있다. 에드워드 양의 영화들이 그러하다.
딱 봐도 철없어 보이는 외삼촌 아디의 결혼식으로 시작한 영화는 극중 내내 말이 없는 외할머니의 장례식으로 끝을 맺는다. 결혼식과 장례식 사이에 한 가족이 놓여있다. 영화 밖의 삶이 그러하듯. 영화는 가족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가족이 중심인 이야기는 아니다. 아버지 NJ, 어머니 밍밍, 딸 팅팅, 아들 양양, 외삼촌 아디는 각자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들 각자는 자신만의 비밀을 품고 나름의 이유로 방황하고 투쟁한다. 스크린 밖의 실제 가족들이 그러하듯.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면 이들의 고투의 결과는 하나로 수렴된다. 장례식장에서 할머니에게 전하는 양양의 마지막 대사는 그러므로 이 영화의 결론이자, 감독의 메시지이다. 이 영화가 유작이 되었으므로 이제 그 말은 유언이 되었다.
이들 가족 구성원은 각자 개별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심지어 각 인물들은 하나의 이야기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도 하다. 세 시간에 이르는 러닝타임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여러 갈래로 발산하는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가족이라는 관념이 아니라 장면간의 연결이다. 영상과 대사와 음악이 모두 이를 위해 복무한다. 영화 전체가 매치컷으로 이뤄진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새로운 씬의 시작은 이전 씬의 다른 인물들의 대화를 새로운 인물들이 반복하거나 대립하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이다. NJ가 사업상 만나는 일본인 오타가 말한다. “인생의 하루하루가 다 처음인데 왜 사람들은 처음을 두려워 하는가? 누구도 같은 날을 두 번 살 수 없다.” 오타와의 씬 이후 NJ가 귀가하면 아내 밍밍과의 씬이 시작된다. NJ가 집에 들어가면 밍밍이 혼자 흐느끼고 있다. 밍밍은 울며 말한다. “엄마에게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아. 매일매일이 너무 똑같아.” 두 씬은 이렇게 연결된다. NJ는 두 씬에서 공히 듣는 위치에 있다.
이런 반복과 연결은 거의 매 씬마다 이뤄진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일본에 있는 NJ와 대만에 있는 팅팅의 교차편집 장면이다. 일본에 출장을 간 NJ는 첫사랑 셰리를 다시 만나 첫 데이트 시절을 회고한다. 이들의 대사가 흐르는 중에 팅팅과 패티의 첫 데이트 장면이 화면에 보인다. 아빠가 처음 손잡았던 날을 회상하는 내레이션 위로 팅팅이 패티와 처음으로 손을 잡는다. 아빠는 말한다. “다시 손을 잡았네. 그 떄와 장소와 시간이 다를 뿐.” 관객은 그 대사를 팅팅과 패티가 잡은 손을 보며 듣는다. 그러므로 팅팅의 데이트는 NJ의 첫데이트의 반복이자 재연처럼 보인다. 심지어 그들의 첫 경험이 어떻게 끝나는지까지 유사하다. NJ가 셰리를 두고 떠났듯 패티는 팅팅을 남겨두고 달아난다.
양양이 처음으로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NJ가 셰리에게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초등학교 시절이었음을 고백하는 장면을 상기시킨다. 이처럼 이 영화는 여러 인물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내지만 거대한 반복과 재연처럼 보이게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 끝이 똑같은 것은 아니다. 혹은 같은 결론에 도달해도 각자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NJ와 아내 밍밍이 영화 종반부에 이르러 나누는 대화는 전혀 다른 두 인물이 어떤 합일에 이룬 것 처럼 보인다. 하지만 앞서 밍밍은 매일매일이 똑같아 견딜 수가 없다고 말했었다. 밍밍에게 일상은 권태이다. 그는 이 지루한 반복을 견딜 수가 없다. 반면 NJ는 할머니에게 요즘 세상은 너무 불확실한 것이 많다고 고백한다. NJ는 확실한 세계에 머무르고 싶은 인물이다. NJ는 불확실한 일이 발생하지 않는 일상을 지향하고, 밍밍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일상을 견딜 수가 없다. 두 사람이 나누는 마지막 대화에서 밍밍은 말한다. 거기 가도 특별한 일은 없더라고. NJ의 대답은 이러하다.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똑같을 것 같아. 두 사람은 긴 여정을 거쳐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 듯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러할까. 우리가 일상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NJ의 방식이어야 할까 혹은 밍밍의 방식이어야 할까. 적어도 이 영화는 거기에 답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NJ의 여정은 오롯이 영화에 담겨 있지만, 밍밍은 집을 떠난 후 온전히 스크린에서 사라진다. 밍밍이 만나는 스님의 대사는 공허하지만, NJ가 만나는 오타의 대사는 묵직하게 가슴에 가라앉는다.
영화에서 주제와 연결되는 정말 중요한 대사들은 가족 외부의 인물들을 통해 발화되는 경우가 많다. 오타와 패티의 대사들이 그러하다. 오타는 심지어 영화 밖에서의 개입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마치 작가가 직접 말을 하는 것처럼. 그는 극중에서 유일하게 온전히 외부인으로 남는다. 그 외부인이 NJ에게 전하는 마지막 대사는 마술과 관련된 것이다. 그는 카드 마술을 보여준다. NJ가 어떤 트릭이냐고 묻는다. 오타는 말한다. 트릭은 없다. 단지 모든 카드를 외웠을 뿐이다. 세상에 마술과 같은 일은 없다. 나는 마술로 너희 회사를 구해줄 수 없다. 이 이야기를 들은 NJ는 마침내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된다.
패티의 대사는 이 영화의 메타적인 면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영화에 대한 영화로 읽어도 손색이 없다. 패티가 첫 데이트로 영화를 본 후 팅팅에게 말한다. “삼촌이 말했어. 영화가 생겨난 후 인간의 수명은 3배가 늘어났다. 일상을 통해 얻는 것 말고도 영화를 통해 2배의 삶을 더 경험한다는 거지. 에를 들면 살인 같은 거” 팅팅이 다시 묻는다. “그래서 내가 얻는 이득이 뭔데? 인생이 그렇게 끔찍하면 뭐하러 살아?” 패티는 답한다. “다른 이유도 많지. 삼촌이 하신 말씀 중에 ‘구름과 나무가 없다면 아름다움도 없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난 그 말에 엄청 감동받았어. 여러 면에서 날 바꿔놨지.” 이후 패티는 영화 종반에 이르면 실제 살인을 한다. 패티에게 이 대사를 준 것은 짓궂기만 할까. 패티는 이 영화에서 아름다움에 가장 경도된 인물이기도 하다.
가족 내부의 인물 가운데 가장 특별한 위치름 점하는 이는 제일 어린 양양이다. 양양의 이야기는 개별적인 다른 가족들의 이야기와도 완전히 구별된다. 양양의 고민은 이 영화의 주제와 가장 밀접하다.
양양이 아빠에게 묻는다. “아빠가 보는 것을 나는 못보고 내가 보는 걸 아빠는 못 봐. 둘 다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해?”
영화 속 인물들은 모두 반쪽짜리 진실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온전하게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없다. 인생은 불가해한 일들의 연속이니까. 영화는 이를 여러 방식으로 드러낸다. 첫 결혼식 장면에서 일군의 여자아이들이 양양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찌르며 괴롭힌다. 양양은 매번 뒤를 돌아보지만 누가 그랬는지 알 수 없다. 진실은 볼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 이는 시각적으로도 표현된다. 많은 장면이 유리창 너머에서 촬영되었다. 인물들이 함께 있거나 대화를 하는 장면 가운데 상당수를 유리창 너머로 또는 유리나 거울에 반사된 모습으로 촬영하였다. 누구의 시점숏인지 알 수 없게 찍힌 이 장면들은 따라서 매우 이질적이다. 경우에 따라 두 인물의 대화는 아예 들리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대화를 보았으나 보지 못했다.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유리창 너머에 존재한다. 떄로는 그 반영만 볼 수 있다.
그것 말고도 영화는 미스터리 투성이다. 할머니는 무엇때문에 쓰러진 것인지 끝내 밝혀지지 않는다. 외삼촌 아디는 정말 죽으려고 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셰리는 왜 일본에서 갑자기 사라진 것인지 말하지 않는다. 패티의 살인은 리리와 리리 엄마 누구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에 대해 알 수 없다.
양양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아빠는 대답한다. “카메라가 있는 이유야. 사진을 찍어.”
이 대답은 이렇게 들린다. “영화가 있는 이유야. 영화를 만들어.”
이것은 비약이 아니다. 장례식에서 양양은 말한다.
“모르는 걸 알려주고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
내가 왜 영화를 만드는가에 대한 세시간짜리 변론을 우리는 보았는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다른 누군가에게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다.
모른던 걸 알기 위해, 보지 못하던 것을 보기 위해.
양양은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할머니는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볼 수 있을 떄 비로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나도 다 컸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