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내 성격이 조금 더 무난했으면 좋겠다.
작은 것들에 덜 동요하고, 스트레스에 덜 민감하고, 눈치나 낌새 같은 것들에 덜 재빠르면 좋았을텐데. 나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닌지라 매일 작은 물결에도 거센 파도가 몰아치는 내면을 소화하며 산다. 너무도 쉽게 깨지는 쿠크다스를 가지고 뻑하면 흔들리는 멘탈을 수시로 잡아가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인간. 그래서 요가를 시작했고, 걷기를 좋아하며 이젠 명상에 미라클모닝 루틴까지 시전하고 있다. 예전엔 <나는 생각이 너무 많아> 혹은 <센서티브> 같은 류의 책도 참 많이 봤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예민함은 신이 준 선물이니, 이걸 무기로 삼아 날을 세워 일을 하면 남들보다 탁월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입을 모아서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도 그런 줄 알았지.
그렇지만 세상엔 늘 기브앤테이크가 존재하는 법, 날을 세워 일을 하면 할 수록 더 거세게 올라오는 통제욕구는 예민함을 다른 세계까지 끌어올려버리는 것이 아닌가. 기질적인 예민함에 일이라는 환경에 걸맞는 예민함을 얹으니, 이건 그냥 신경쇠약에 걸린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지. 원래는 그래도 적당히 밸런스를 맞추며 살 정도로만 예민했었는데, 일을 하다보면 이건 뭐 싸움닭도 아니고 AI도 아닌것이 스스로를 갉아먹으면서까지 날을 세우고 있었다. 문제는 내가 그걸 감당할 그릇이 안 된다는 것. 그 예민함의 근원이 두려움이라면 그런 상태를 정상적인 건강상태로 감당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마는, 누군가들은 그런 예민함마저 무기삼아 뛰어난 업적을 이루기도 한다는데. 나는 애초에 그럴 맷집을 갖고 태어나지 못해서 자꾸만 소화불량에 시달리거나 과열된 머리 속도때문에 잠이 오지 않아 지난 몇년간 수면 장애를 겪었다(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니 수면 퀄리티 Fail). 출퇴근 지하철에서는 숨이 막히고 속이 울렁거렸고(물론 술도 한몫 한다), 주말에는 아무런 기운이 없어서 오래 된 친구들 말고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에너지가 후달렸다(그러니 소개팅을 해도 잘 될 리가 있나). 이렇게 살면 안 된다라는 각성의 목소리 그리고 사회에서 만든 '나이스 걸' 스탠다드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기에 건강식을 먹고 요가를 하며 디톡스를 했다(안 그랬으면 내 몸은 벌써 아작났다). 그러고도 주중에는 스트레스에 못이겨 야근하다 말고 나와서 술을 마시고 폭식을 하는 일상의 반복. 그게 내 이십대 중후반의 단상이라면 지금은 뭔가 좀 나아져야 하는거 아닌가. 나는 왜 여전히 버티는 것에 서툴고, 버티는 삶에 반감이 드는걸까.
왜 계속 버티는 삶을 살아야하는가, 라는 근본적 질문을 멈출 수가 없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왜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렇지 않게, 좀 더 평온하게 하루를 넘길 수가 없는 가에 대한 자조적 질문이기도 하다. 그 둘은 다르면서도 맞닿아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내 주변의 그 누구도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기 때문. 각자에게는 나름의 전투가 있는 법이니, 다들 어느부분에서는 치열하겠거니하고 배려하고 이해하는 삶이 우리들이 공유하는 '노멀'이자 정상의 범위일테니까. 자꾸만 그 비슷비슷한 삶을 못견뎌하고 너무 쉽게 동요해버리는 나는, 그만큼 참을성이 없거나 나잇값을 못하거나 잘못 살고있거나... 아니면 그 세가지 모두에 해당 될 터였다. 모두들 다 이정도는 버티면서도 그러려니하며 사는데, 왜 너는 매번 그렇게 힘들어하니. 너만 특별히 힘든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의미를 부여하니.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면 나는 분명 딱히 할 말이 없어질 것이었다. 그렇지만, 더한 사실은 단지 버티는 삶을 살 때보다 버티지 않기로 결심하면 더 큰 민감함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분명한 건 사실 모두가 하루하루 조금이라도 덜 버티면서 살고 싶다고, 비슷한 걸 소망한다는 것이다. 다른 달을 보고 있어도 같은 꿈을 꾸는 우리들(김동조 작가의 책 제목을 인용, 아직 책은 Ebook이 없어 못 읽음)이랄까. 그 고민을 매번 던지며 살아가는 이상 역시 작은 것에도 크게 반응하는 민감함을 발휘하지 않을 수가 없는 거다. 내게 있어 바운더리는 무엇이며 누군가가 그 선을 넘는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나면, 버틸지 말지만 결정하면 된다. 누군가 선을 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으로 내 정신적 자유와 건강함은 지킬 수 있다. 대신에 작은 것에도 엄청나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으로 살아야하니 멘탈은 더욱 흔들흔들 해질지도 혹은 선을 지키느라 정작 밥그릇은 못 지킬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그러려니가 안 되는 삶이란, 내 일상을 너무도 쉽게 뒤흔들고 만다. 자구책을 찾는답시고 나름 넘치는 에너지나 마음속에 있는 열정 같은거 좀 넣어뒀는데도 여전히 안 되니, 이건 그냥 그렇게 생겨먹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한 곳에서 평온하고 끈기있게 오랜 기간을 보내며 안정되고 싶은 욕구가 없는 건 아닌데, 그게 안 되는 걸 보면 아직도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싶은게 너무 많은거 같다.
사실 그게 또 뒤흔들리는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의 묘미, 어쨋거나 선택권은 내게 있다는 것이 자랑아닌 자랑이 된다. 지구별 여행자 모드로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 매 순간 자신에게 챌린지를 걸며 살아갈 자유. 단지 일 년이나 육개월쯤 이후의 삶을 예측 못하는 것을 지나서 다음달의 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운 삶은 수많은 선택지와 기회 속에 놓여있는 것이다.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모두 다 놓아버리든, 서서히 모래사장에 모래를 놓아주듯 흘려버리든, 그도 아니면 흐르는 강물에 나를 맡기고 아무 것도 취하지 않는 자세로 살든 간에 그 선택의 주체는 최소한 자기 자신이 되는 삶인 것이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고 둥둥 떠다니는 인간으로서는 오늘 당장 나의 진로를 바꿔서 내일 어디로 훌쩍 떠나더라도 큰 문제는 없다. 안정의 반대는 자유, 자유의 반대는 속박이기도 하니까. 다만 사람들이 그리울 뿐이겠지. 언제 어디를 가도 믿을 것은 건강한 몸과 정신 그리고 나의 기술과 운, 그리고 사람에 대한 사랑과 믿음뿐이다.
딱히 박애주의자도 아니고, 개인주의가 강하면서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남는 것은 우리가 주고 받는 눈빛, 오고 간 마음과 함께 나눈 시간 같은 것들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다 설명하기 어려운 것들을 보고 만지고 겪는 동안 하루가 너무 빠르게 지나가고, 그 안에서 나는 또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느라 숨이 가빠오기까지 한다. 그래서 머리를 비우고 아무 것도 생산해내지 않는 날에도 나는 너무 진지하고 생각이 많아 가벼워지지 못한다. 생활적인 면에서는 매일같이 허당의 역사를 새로 쓰고, 머리속으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철학적 질문들을 던지느라 오글거림의 역사를 매번 갱신하고. 그 와중에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생활이 늘 아깝고 벌써 애달픈 마음이 드는 것을 모면 사람들을 더 많이 기억해야겠다. 다 지나가버리고나면 그만, 아쉬워도 다시 돌릴 수가 없는 사람들이니. 특히 해외에서 만나는 인연들은 하루가 다르게 멀어지고 다시 붙잡을 수 없느니 어쩌겠어. 나도 이번 생이 처음이라서 서툴기는 한데, 잘 해보고 싶거든.
그리고, 감정기복이 좀 덜하고 잔잔한 파도같은 혹은 단단한 나무같은 성격으로 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면, 이 파도치는 감정 덕에 더 자주 재밌고 기쁘고 행복한 것이니 감사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