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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is the work of a young trader who was inspired by markets. He asked me to showcase his work.
Ladies and gentleman, I introduce Knua.
얼마나 화려하고 자유롭고 특별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조금 다르다고 해서 속이 다르지는 않아 '곪는 건 똑같아' 티가 잘 나지 않을 뿐 외적으로도ㅡ내적으로도 이해가 잘 안될지 모르지만 그게, 그래 (c) by 2013
포스트모던의 끔찍한 탈근대성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3장 발제문 요약
지난 20여년간 탈근대postmodern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이루어졌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어떤 형태로든 ‘포스트모던’이라는 용어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생활양식과 그에 대한 문화적 반응 양쪽에서 실질적인 전환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단어라는 것이다.
지젝의 탈근대 분석은 울리히 벡과 앤서니 기든스가 주장한 위험사회 이론에서 출발한다. 이 이론의 위험이란 지구 온난화나 유전자 변형처럼 발생할 확률은 낮지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위험들로, 이들의 공통점은 인간이 자연에 개입함으로써 만들어진 ‘제조된 위험’이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위험의 발생확률을 낮추기 위해 우리는 과학기술의 개입을 더 늘릴 수밖에 없고, 이는 또 다른 예측불허의 결과를 양산한다. 즉 우리는 위험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새로운 불확실한 위험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자기재귀적인 올가미에 사로잡힌 것이다.
지젝이 탈근대성을 이해하는 열쇠는 바로 이 재귀성reflexibility에 있다. 이런 불투명하고 불가한 위험은 어떤 초월적인 힘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아무도 책임이 없으며’ ‘그런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우리는 의존할 만한 토대가 없고 전통이나 관습, 자연 그 어디에도 기반을 두고 있지 않은 완벽하게 주관적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대타자의 붕괴
재귀성의 핵심은 사회제도, 관습, 법 등의 붕괴, 대타자의 최종적인 붕괴이다. 이는 라캉의 신에 대한 언급과 상통한다. ‘신이 죽은 게 아니라 언제나 죽어 있었는데, 다만 신 자신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듯, ‘대타자는 애초부터 물질적 존재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언제나 죽어 있었’다. 대타자는 언제나 상징적이고 허구적인 질서였으며, 우리가 모두 동의한 일종의 거짓말이다. 왕이 벌거벗고 있어도 우리가 충실한 신민으로 남기 위해 그가 새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듯.
그러나 탈근대의 시대에서, 우리는 이제 왕이 옷을 입었다는 대타자의 말이 아닌 우리 자신의 눈을 믿는다. 그리고 지젝은 이를 위선이 사라진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라, 우리가 속한 공동체 자체가 해체되는 상황으로 본다. 상징적 효력이 치명적으로 손상되었기 때문이다.
상징적 효력이란, ‘나의 시가 출판되기 전까지 나는 시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같은 기술을 가진 동일한 사람이지만, 그것이 대타자(상징적 제도)에 의해 등록되기 전까지 그 사실은 누구에게도 효력이 없다. 오늘날 주체에게 동일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대타자다. 내 인격의 다른 측면들은 상징적 효력을 공표하는 대타자에 의해 등록됨으로써만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내 자신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결정할 수 있다.
이런 대타자의 권위가 사라짐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자연이나 전통의 주체가 아닌 선택의 주체가 된다. 관습적 속박에서 사라지고 선택의 문제만이 남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좋기만 한 일인가? 지젝은 일단 좋다는 쪽에 동의하나, 그는 또한 ‘우리가 결별한 것이 단지 특정 전통이나 관습뿐 아니라 모든 종류의 행위양식이라는 것’이라 이야기한다.
규제에 대한 욕망
증가하는 재귀화reflexiviation와 그로 인한 상징적 효력의 붕괴로 인한 문제 중 하나는 복종에 대한 집착(일례로는 가학-피학적 성애의 증가)이 있다. 더 이상 대타자의 법에 종속되지 않게 되었을 때, 공식적 권위의 상실을 벌충하기 위해 사적인 법이나 지배종속 관계에 호소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자유로운 위반 행위가 공적 규제를 전복시킨다는 통념을 뒤집는 것으로, 오늘날 우리가 성취한 공적인 평등이 개인적인 지배관계로 전복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이 자유로운 선택을 할 때는 자유롭게 선택하는 자신을 부정하는 행위가 위반이’ 되는 것.
지금, 서구 사회에서는 성적 쾌락이 금지되어 있기는커녕 이미 공식 이데올로기의 지위를 차지했다. ‘섹스를 즐기라!’는 명령-초자아의 귀환. 초자아는 흔히 ‘우리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법의 목소리’라 알려져 있으나, 지젝은 초자아는 법이 아니라 ‘법이 억압하는 것을 자양분으로 삼는 법의 이면’이라 말한다. 다시 말해, 초자아는 ‘허가된 향락, 향락에 대한 자유가 향락에 대한 의무로 전도되는 지점을 가리킨다’. 오늘날 초자아의 즐기라는 명령은 우리로 하여금 지시된 향락을 수행할 수 없게/향락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든다.
ex1. 비아그라 - “너에게는 더 이상 섹스를 하지 않을 변명거리가 없다”
ex2. <절대적 허풍Absolutely Fabulous> - “딸의 유일한 쾌락의 통로는 얼마간의 고통에 개입하는 것“
이처럼, 탈근대성의 역설은 대타자의 붕괴로 인해 얻은 자유가 다시 규제에 대한 욕망을 일으킨다는 데 있다. 탈근대의 자유는 문법적 틀이 없는 언어활동의 자유와 유사한 것이다. 우리는 문법을 숙달한 후에야 언어 속에서 자유롭게 사고할 수 있다. 규칙이 없다면 언어는 무거운 짐이 될 뿐이다. 대타자의 붕괴는 우리에게서 해석 규칙과 규범을 빼앗아갔고, 우리는 이를 보상하기 위해 ‘무수히 작은 타자들’, 혹은 ‘부분적인 대타자들’을 발생시킨다.
1) 작은 대타자 : 과학기술의 성과에서 비롯된 윤리적 딜레마들을 해결하기 위한 전문가 위원회. 이런 위원회의 증가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상징적 금기들의 부재를 시사한다. 때문에 각종 윤리위원회는 사이버 스페이스, 태아의 유전자 조작, 인터넷상의 섹스 등의 문제에 대해 답한다. 개별 주체들은 윤리적 문제에 대한 책임을 위원회에 떠넘김으로써 자신의 몫이었던 ‘해명의 자유’가 주는 부담을 없앤다.
2) 실재 속에 존재하는 대타자 : 실재로 배후에서 사회를 조종하는 사람 혹은 조직에 대한 믿음. 이런 믿음은 편집증의 징후의 하나인데, 지젝은 이런 편집증의 원인이 대타자의 붕괴에 대한 반작용에 있다고 한다.
“그런 편집증적 형성물에 직면하여 우리는 그것을 ‘병’ 자체로 오인하지 말라는 프로이트의 경고를 명심해야 한다. 편집증적 형성물은 오히려 우리 자신을 치유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즉, 그것은 이런 대체 형성을 통해 실재적 ‘병’, ‘세계의 종말’, 상징적 우주의 붕괴에서 우리 자신을 구해내려는 시도이다.” (LA:19)
그리하여, 탈근대적 주체란 ‘공식적 제도에 노골적인 냉소를’ 드러내며 ‘모든 것을 조종하는 보이지 않는 타자 혹은 음모를 확고하게 믿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는 대타자의 위치가 상징계에서 실재계로 옮겨왔다는 뜻인데, 이와 관련된 사례로는
ex1. 예수의 '진실한' 삶에 대한 관심의 증가 : ‘신도들의 영적 공동체인 성령의 상징적 효력이 점점 약해지는 상황에서, 이를 예수 혹은 그 자손의 육체적 실재로 대체하는 것’
ex2. 문신, 피어싱, 신체 훼손 등 : ‘이교도적 문화에서 신체 절단이나 각인은 그 사람이 해당 문화의 사회적/상징적 질서 속에 편입되어 그 문화권의 일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 이 사례에서는 신체 절단이 실재(육체)에서 상징계(사회의 구성)로의 이동을 나타내는 반면, 이교도적인 다수의 신체 절단으로서의 탈근대적 회귀는 (…) 사회적 소속의 표식이 아니라 (…) 개인들이 자신의 개별성을 드러내고 대타자에 대한 종속에 맞서는 수단을 나타낸다.’
이는 라캉이 “상징적 효력이 중지될 때 상상계는 실재계로 전락한다.”(TTS:374)고 공식화한 것의 현실적 모습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대타자 속에서 찾으려 했던 것을 이제 우리 자신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이데올로기적 메시지를 받으며 살아간다.
행위, 주체의 재탄생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딜레마를 해소할 수 있는가? 지젝이 제시하는 유일한 방법은 행위를 통한 해소이다.
행위는 현존하는 상징적 질서의 완전한 거부이며, 행위 속에서 주체는 문자 그대로 사라진다. 행위는 ‘주체 탄생 과정의 반복’이며, ‘회귀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까지 걸고서 세계로부터 제 자신을 철회시키는 광기의 행위’, ‘자기 자신을 가격하는 방법, 즉 상징적 자살의 한 형식’이다.
ex1.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카이저 소제가 항복하는 대신 가족을 쏴 죽이는 것. “이 행위는 자기 자신을 향한 무력한 공격이 아니라 주체가 자신을 발견하는 상황 좌표의 변화를 의미한다.”(TFA:150)
ex2. 토니 모리슨의 <소중한 사람Beloved>에서 세드가 자기 딸을 노예로 만들지 않기 위해 죽이는 것. 상징적 질서 내에서 딸을 지키기 위한 유일한 방법.
ex3. 십자가의 고난. 성령, 즉 새로운 주체를 위해 가장 소중한 존재를 희생시킨다. ‘자기 잠재성을 재발견하고 실현하기’를 요구하는 뉴에이지와는 다름. 새로운 자기를 창조하는 것.
탈근대적 정치담론은 자유주의-자본주의의 지평 안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의료 서비스에 필요한 자금, 세금의 비중 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자본주의 자체는 결코 문제삼지 않는다. 때문에, 지젝은 이런 탈근대적 주체의 곤경들을 해결하기 위해, 그 지평, 상징계 자체를 바꿔야 한다 말한다. 그는 정치적 행위, 나아가 혁명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그 속에서 비로소 탈근대성의 가능 조건(자본주의)들이 바뀌며, 새로운 주체가 존재하기 위한 새로운 상징적 질서가 탄생하리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