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감독 영화 ‘헤어질 결심'을 본 소감은 세련됐지만, 한국에선 별 호응을 못 얻은 게 왠지 이해가 갔다. 편견일 수 있겠으나 내 눈에 비친 현재 한국 사회는 많이 경박해져 있고, 이런 헤비한 주제를 꺼내면 “진지충” 운운 경멸하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고 느낀다. 말러 5번 역시 약간 유명해지려다 흥행이 지지부진하며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난 것 같다.
20대 초반에 '슈타이너 학교의 음악교육'이란 책을 사서 읽었다. 세광음악출판사, 1988년 4월 20일 초판 발행으로 돼 있다. 나는 90년대 초반에 산 거로 기억한다. 아마 그때까지도 초판이 다 안 팔렸던 것 같다. 내용이 굉장히 신선했고, 꽤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은 다 부질없는 썰에 불과하지 않은가 한다. 요즘 한국에선 슈타이너 학교를 '발도르프'란 이름으로 부르는 것 같다.
168~169쪽에 말러 5번 얘기가 나온다. 저자 딸의 음악 선생과 1971년 개봉한 비스콘티 감독 영화 '베니스에서의 죽음(Morte a Venezia)'에 관해 나눈 잡담이었다. 덕분에 말러 5번 4악장이 이미 딴 영화에서 사용됐음을 알았다. 감독이기 전에 영화광으로 알려진 박찬욱 씨라면 당연히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봤을 거고 어쩌면 자신의 영화에 오마주 한 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 구글 검색을 하니 “흉내 내는 느낌을 받는 게 싫어서 오랜 시간 대체할 만한 다른 음악을 찾았지만, 대안을 찾지 못했다"는 답변을 찾았다. 그러니까 오마주는 아닌 걸로. 책에선 '바르빌로리'란 지휘자가 녹음한 음반을 구해 함께 들으며 소감을 나누는 걸로 이어진다. 처음 보고 어리둥절했는데 아마도 존 바비롤리(John Barbirolli)인 것 같다. (보통 바비롤리, 바르비롤리라고 하지 바르빌로리라고 쓴 경우는 본 적이 없다.)
이 부분을 읽고 나니 자연히 '베니스에서의 죽음'이 어떤 영화인지 궁금해 동네 비디오 대여점을 훑었다. 하지만 '젖소 부인 바람 났네’ 같은 건 흔해도 외국에서조차 흥행이 안 된 이태리 영화를 국내에서 쉽게 구할 수 있을 리 없다. 결국 실패. 하지만 말러 5번은 구할 수 있었다. 동네 음반 가게엔 없었지만, 종로 신나라 레코드 같은 델 가면 당연히… 이런 사연으로 말러 교향곡 9개 중 5번을 제일 처음 들었다. LP를 다 처분해버려 어느 단체가 연주했는지 확실친 않지만 아마도 번스타인 + 뉴욕필 아니었겠는가 싶다. 이때부터 말러와 나 사이 보이지 않는 밀당이 20~30년에 걸쳐 있다. "도대체 이런 걸 왜 듣냐"며 투덜대면서도 꾸준히 반복 청취했고, 몇 년 전부터 일부 결실이 나타났다. 특히 산행을 할 때면 골전도 이어폰으로 종종 말러를 듣곤 한다. 바람소리, 새소리와 말러가 뒤섞이며 아주 묘한 기운에 휩싸이는 맛이 있다. 혹자는 교향곡 스코어를 본 적 없고, 좋은 오디오 시스템도 없으면서 말러를 듣는다 말할 수 있냐고 비난할지 모르겠으나 난 내 식대로 그 음악들에 조금씩 다가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