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에 멈춰 선 그대에게 - 자우림의 LIFE!를 들으며
자우림의 열두번째 정규앨범인 LIFE!를 반복해서 듣고 있다. 지금은 만나기 어려운 10곡의 구성으로 이루어진 정규앨범이라 참으로 반갑고 풍요롭다. 생(生)이란 의미의 앨범 이름처럼 모든 노래들이 삶의 단면을 다루고 있고 생의 중간을 살아가고 달려가고 있는 한 사람의 러닝크루로서 동지애가 느껴지기도 한다.
[LIFE!]
첫번째 타이틀곡인 "라이프"에서는 삶의 중간에 문득 고개를 들어 멈춰 섰을 때와 같은 상황을 상상했다. 심장의 고동소리로 노래는 시작한다. 우리의 삶은 롤러코스터와 같아서 한 번 레일에 올랐을 때는 멈춤 없는 흐름처럼 느껴지지만 잠깐 의문을 품으면 그 순간 시간은 정지하고 막막한 길 위에 멈춰 선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 인도 아대륙(亞大陸)을 향하여 질주할 때 우리는 이스킨다르와 같지만 멈춘 순간 열병으로 앓아 눕기 마련이다. 앞에는 알 수 없는 미래가 시커멓게 일렁이고 있는데 뒤돌아 보면 어떻게 손을 대지도 못한 채 넘어가 버린 과거가 이제는 미래 만큼이나 꽤 쌓여 있다. 마치 이상은의 "생의 한가운데"라는 노래에서 마주했던 것 같은 상황. "뒤돌아보니 처음은 보이지 않고 앞을 보니 끝도 보이지 않네." 그러나 자우림이 라이프에서 제시하는 상황은 그렇게 관조적일 수 없고 조금 더 피로하며 절박하다.
"어디로도 갈 수 없어서 우두커니 여기 멈춰 있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냥 날 좀 내버려 둬."
이것은 더욱 한국적이고 현재적인 피로다. 요구가 가득한 삶을 살아가며 수많은 자기계발론들은 쉽고 확실한 해법을 제시하지만 우리의 삶은 답을 찾지 못했고 어느 순간 멈춰 버렸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고 두려워하지 말고 달려보라고 누구라도 그런 쉬운 말은 해."
Life, answer me. 이 탄식적인 외침이 인생 자체에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준다. 누구에게 탓도 돌릴 수 없는 채 아무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멈춰 서있다. 아무 기차도 오지 않는 빈 플랫폼에 홀로 선 채 인생 그 자체에게 물으면서 앨범이 시작된다. 마치 소설의 시작과 같은 출발점이다.
[마이 걸]
두번째 타이틀 곡인 "마이 걸"은 더욱 시대적인 노래이다. 지금의 여성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야 내가 처음부터 아니라고 했지. 아직은 달아날 수 있어. 뒤돌아보지 말고 도망쳐."
그러나 한편으로 이 노래는 과거에 관한 노래다. 지나 버린 인연에 관한 노래다.
"오랫동안 우린 알아왔지. 말이 통해서 좋아했지. 미친 짓 하면 알려주기로 말해주기로 약속했잖아."
삶에 때로는 도망이 필요했고 도망쳐야 했던, 혹은 도망친 순간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구하지 못한 채 흩어져 버린 알아 온 사람들을 생각하게 된다. 말이 한 때 잘 통했고 함께 미쳐 있었던 그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어 버린 것일까. 잘 도망쳤을까. 나는 그 때 제대로 말한 것일까. 지옥에 떨어진 것이 아니길. 어쩌면 떨어진 것은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
[뱀파이어]
"뱀파이어"를 들으며 좀 더 회고적인 기분에 잠긴다. 얼마 전에 대학 시절 인연이 있던, 혹은 나름의 썸이 있던 친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전화를 받았을 때는 마치 몸이 더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근황을 전해 들으며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택한 직업과 결혼, 아이. 아이를 안은 채 전화하는 그 모습. 이 모든 것들이 생경하게 느껴졌다. 아. 이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과 다른 사람이라는 느낌까지 들었다.
어쩌면 내가 기억하고 내가 좋아하던 남자들은 이미 죽었고 추억 속에만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억 속의 남자들은 이미 죽었고 마치 뱀파이어처럼 창백한 채로 기억 속에서만 살아 있는 것이다.
"해는 늘 떠있고 너는 미쳐있고"
여전히 해가 떠 있는 이 세계에서 그 남자들은 내가 기억 못하는 생경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 내 추억이 된 뱀파이어 같은 기억 속의 남자들은 어쩐지 젊은 그 때처럼 미쳐 있을 뿐이고 그 자체로 이 시대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저 광인일 터이다. 추억 자체가 미쳐 있다. 돌이켜 보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이미 죽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입 맞추면 나 역시 미쳐있고 어둠에 눈이 부신 무엇인가가 될 뿐이다.
[카르마]
좀 더 과거로 침잠할 때쯤 "카르마"라는 노래를 들어 본다. 과거란 무거운 것이다. 나 역시 부서진 채로 과거를 피해 도망쳤던 것 같다. 지금도 서울에 자리 잡지 않은 것은 어쩌면 과거의 부서진 인연들을 가급적 만나지 않기 위해서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정리하지 못했던 그 모든 것들이 짐으로, 카르마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업보에 관한 노래가 아니다. 떨침의 노래고 의지의 노래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고 남은 잿더미에 앉아. 언제까지나 괜찮지 않아."
이 노래는 생을 다시 찾으라고 말하고 있다. 나의 우울하고 미쳐 있던 그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나도 그 사람들도 구하지 못했고 그것은 무거운 짐이었다. 하지만, 이미 태양 아래 실재하는 그들은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이제는 낡은 비유지만 그 시절 나온 드라마의 "추억은 아무 힘도 없다." 같은 대사를 떠올린다.
[스타스]
세번째 타이틀곡인 "스타스"는 다시금 도달한 현재의 노래이다. 솔직하고 무한하게 표현된 사랑의 감정이 깊게 묘사되어 부모가 된 어른의 감정처럼 느껴진다. 지금의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리게 하고 그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를 되새기게 한다. 마치 자장가처럼 달래면서 이어진다. 아직도 탐을 내고 예뻐할 사랑이 남아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무엇과도 바꾸지 못할 지금의 연인을 떠올리게 한다.
[렛 잇 다이]
그 다음 곡인 "렛 잇 다이"는 미래를 향한다. 시대의 나아감을 말하는 노래다. 그런데 그 메시지의 분명함은 오히려 지난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을 떠올리게 한다. 어쩐지 서태지의 노래를 기억나게 한다.
"Let it die
Now is the time
시대는 나아가야 해
Let it die
New era comes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어"
그러한 분위기까지 결합되어 가사의 메시지를 살펴 보면 과거를 거쳐온 사람만이 현재에 내릴 수 있는 평가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결코 과거를 회복하자고 말하는 것이 아니기에 미래를 위한 메시지라는 것이 철저하게 드러난다. 과거는 죽게 하고 죽은 채로 두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목소리가 분명하다.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때임을 알린다.
[유겐트]
"유겐트"를 들으면서는 뭔가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어째설까. 꽤 유쾌한 노래다. 노래가 담고 있는 주제는 무척 무거움에도 이상하게 미소를 짓게 되었다. 아무래도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내란의 유겐트가 되어 서부지방법원을 향해 진군했던 그들의 모습을 떨치기가 어렵다. 상황은 무겁고 끔찍함에도 그 레밍 떼의 행진은 코믹한 기분마저 들게 하였다. 피리를 불고 있는 술주정뱅이 독재자와 그를 따르는 무수한 젊은 쥐의 무리들. 역병의 진군 같기도 하다.
"제군이여 진격을 멈춰. 무엇을 위해서 싸우고 있는가. 증오에 묶여 춤을 추는 그대여. 세상의 종말은 제군의 종말."
그들이 불태우려는 사회는 나 역시 속해 있어서 그들과 운명공동체라는 것을 부인할 수도 없기도 하거니와 그들의 모습이 그저 안타깝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진지한 메시지가 느껴졌다. "Billy, Don't be a hero" 가 그 시대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호소하였던 것처럼 쾌활하면서도 우울하고 웃기기도 한 그런 감정이 살아 있는 노래라고 생각했다.
실로 따뜻하다는 생각도 하였다. 난 자우림의 "20세기 소년소녀"라는 노래를 무척 좋아하는데 이것은 우리 조금 앞 세대의 사람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노래였다. 지나간 세대의 사람들 역시 모두 소년, 소녀였음을 기억하고 그들의 시대를 애정을 담아 회상하는 노래였다. 그런 자우림은 이번 앨범의 "유겐트"에서는 미래 세대에 대한 애정도 감추지 못한다. 우리의 유겐트들은 어느 시대에 애정을 남길 수 있을까. 언젠가 그들도 그런 마음의 여유를 품을 수 있을까. 죽은 독재자들에게 보내는 막연한 연서(戀書) 말고는 딱히 찾기 어려운 것 같다.
[아테나]
"아테나"는 당연히 이 시대 젊은 여성들에게 보내는 축복의 찬가다.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승리의 여신 니케를 거느리고 온다. 우리 슬픈 유겐트들과 달리 긍정적인 미래를 열 수 있는 주체가 누구인지는 분명하다. 이 쾌활함과 희망참은 거의 김연자의 "아침의 나라에서"에 버금갈 정도다. 비록 이 시대는 어둡다. 그러나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에 날개를 펴는 것이다.
"마음을 열어. 포기하긴 일러. 고개를 들어서 미래를 봐. 작고 반짝이는 너의 순간들을 여신이 축복한다."
참으로 뜨거운 응원이 아닐 수 없다.
[바쿠스]
"바쿠스"는 아테나와는 대척점에 선 존재이다. 이성과 지혜를 담당하는 아테나와는 달리 이 쪽은 술과 광기쪽이다. "이보게 친구! 마실 것이 필요해."라는 첫 소절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매우 뮤지컬적인 느낌이 든다. 왁자지껄함 속에서 허무주의적인 메시지가 느껴지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뮤지컬 햄릿의 "오늘 밤을 위해"라는 곡이 떠올랐다.
햄릿은 인간 고뇌를 다룬 상징적인 작품으로 여겨지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남성적 중2병의 변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솔직히 햄릿이 고뇌할 것이 뭐가 있었나. 오필리아는 미친 연인에 의해 부친이 살해 당하는 것까지 목도해야 했다. 어쩌면 남성의 고뇌만이 명명되어 왔던 것이지 그 자체가 어떤 무게가 있었던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는 그저 술을 마시기 위한 핑계였을지도 모르고.
[콜타르 하트]
마지막 곡인 "콜타르 하트"를 들으면 새벽 3시의 이 술집의 마지막 손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삶이라는 온갖 면모를 여러 노래를 통하여 조망해 보았지만 이제 다시 돌아온 곳에는 현재의 삶이 남아 있다. 다시 지하철 플랫폼 앞에 서서 돌아오는 첫 차를 기다려야 한다. 다카스기 신사쿠는 "삼천세계 까마귀를 다 죽이고 서방님과 늦잠을 자고 싶구나."라는 도도이츠를 남겼다는데 연인과 엉겨 늪 속에 잠기고 싶은 마음을 어찌 모를까. 삶의 흐름을 좀 더 미뤄두고 싶지만 도통 그렇게 되지는 않는 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