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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아.
번호를 바꾸지 않았다.
루한은 새삼스럽게 그간 자신이 얼마나 잊고 살았는지를 실감했다. 꽤 오래 전에 헤어진 전 애인이 자신의 집에 들어와 냉장고 정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달리 큰 감상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고 다만 그 동안 바꾼다 바꾼다 미루기만 했던 비밀번호를 깜빡하고 바꾸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가 헤어졌을 때는 가을 초입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겨울.
해도 바뀌었다.
“……웬일이에요?”
눈 맞은 코트를 벗지도 못한 채 그대로 서서 루한이 레이에게 물었다. 스웨터 차림의 레이가 잠깐 냉장고를 보곤 한숨을 삼킨다. 루한의 냉장고 앞에 한 쪽 무릎 꿇고 앉아 안을 정리하던 레이가 차츰 루한을 돌아봤다. 뭐라 해야 할까. 처음에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네 연락처는 바뀌었던데 현관 비밀번호는 그대로더라고. 그냥 혹시나 하고 눌러봤던 거야. 먼저 들어와 있어서 미안해. 말을 했어야 했는데. 오래 기다렸는데 네가 늦더라고. 기다리다가 장을 좀 봤어. 아, 저녁은 먹었어? 그리고 그 동안, ……잘 지냈어? 많은 말이 있었지만 모두 변명이었다. 마음을 정하기도 전에 입술이 먼저 벌어진다. 웃음이 애석했다.
“매달리러 왔어.”
에필로그
루한에게는 예능이라는 것이 그랬다. 실력은 내가 매일매일 정직하게 노력한다고 해서 하루하루 차근차근 늘어가는 것이 아니었다. 슬럼프를 겪고, 극복 아닌 극복을 하고, 겪고, 한 번 쯤은 제대로 극복하고, 때로는 엄청난 슬럼프가 오고, 벗어나지 못할 때도 있고, 포기하는 마음으로 살다가 또 어느 날이면 괜찮아지고. 십대이던 시절부터 루한은 침체기를 겪을 때마다 스스로를 다스리는 말이 있었다. 육개월.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육개월이면 충분하다, 그것이 인생일지라도. 그 마음가짐으로 육개월 동안 죽어라 고생을 하면 그 끝에는 뭐가 되든 안 되든 스스로는 만족하곤 했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더한 좌절이었을지 몰라도 루한에게는 그러한 다스림이 잘 맞는 편이었다.
그와 헤어지고 육개월이 지났다.
루한은 육개월 간 많은 노력을 했다. 그가 설마 찾아올 지도 몰라, 그 희망 하나로 바꿔야지 하면서도 바꾸지 않았던 것이 현관 비밀번호였다. 그 자체를 까먹게 되기까지 육개월이 걸렸다. 주변에서 시키는 건 다 했던 것 같다. 취미를 가져봐, 사람들을 많이 만나, 일을 더 많이 해, 운동을 해. 무엇이든 요행을 바라지 않고 성실하게 하는 편이라 대부분의 조언을 따랐고 그렇게 반년을 보냈다. 내가 나름 잘 하고 있었구나. 루한은 지난 어느 날처럼 레이가 차려준 늦은 저녁상 앞에서 그런 생각을 한다. 담담했다.
“어떻게 지냈어요?”
식탁 앞에 마주 앉았다. 루한은 포크 쥔 손을 잠깐 멈추고 그에게 물었다. 턱 괴고 앉아있던 레이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루한을 마주본다. 전과 비슷했다. 제 때에 일이 끝나 먼저 돌아온 레이가 그를 기다리고, 오늘처럼 유난히 늦은 날이면 식탁 맞은편에 앉아 루한이 식사하는 걸 지켜본다. 하루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고 가끔은 다른 이야기들도 했다. 이 자리에서 그가 말수가 없어졌을 때 즈음에, 알았던 것 같다.
아, 우리가 헤어지는 중이구나.
“난 그럭저럭 잘 지냈어요.”
루한이 어설프게 웃었다. 웃음이 어설픈 까닭은, 정말이지 잘 지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쑥스럽기도 하고 긴장도 됐다. 이게 맞는 대답일까, 싶어서. 레이가 비슷하게 입매로만 웃는다. 흐리게 뜬 눈으로 잠시 딴 곳을 보다가 레이가 말했다.
“나도 잘 지냈어.”
다행이다.
루한이 손을 움직인다. 그가 잘 지냈다고 대답해주길 바랬던 것 같다.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지만 나중에는 그럭저럭 잘 지냈다고. 나는 그러했어요. 그러니까, 다행이에요.
불 꺼진 집안. 식탁 위의 미등만 밝혀두고 마주 앉아 잠시 말을 잊는다. 레이가 벽에 등을 기대며 옆으로 비스듬하게 자세를 바꾸었다. 식기 부딪치는 소리만 간간히 났다. 한참 뒤에야 레이가 솔직하게 대답한다.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사실 잘 못 지냈어.”
가슴 한 켠이 소리 없이 무너지고,
“그래서 온 거 같아.”
무너진 둑으로 물이 새니 소리도 없이 젖는다.
평소에도 스트레스를 받으면 잘 먹질 못했다. 루한은 난감한 얼굴로 자기 그릇을 내려다본다. 몇 입 먹지도 못했는데 못 먹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정을 말하지 않아도 아는지 레이가 먼저 말한다. 괜찮아, 남겨도.
술 마시러 갈래요?
뒷정리를 하는 레이의 등에 대고 루한은 부러 밝게 말했다. 레이가 설거지를 하면서 힐끗 돌아본다. 이번엔 루한이 식탁에 앉아 턱을 괴었다.
“나가서 먹어도 되고. 집에서 와인 먹어도 되고.”
“넌 어쩌고 싶은데?”
고개를 원위치한 레이가 되묻는다. 루한이 한숨 아닌 한숨을 쉬었다가 실소 섞어 대답했다. 자랑할 일은 아닌데 자랑처럼 말할 생각이라서.
“나 술 되게 많이 늘었어요. 작년까지 주변에서 사람들이 술 많이 먹고 많이 놀라고 그래서 진짜 그랬거든요.”
레이가 거품을 보며 옅게 웃는다. 어쩔까 하다가 나가기로 한다.
두 분 오랜만이시네요.
사귀던 시절엔 곧잘 오던 바로 왔다. 그리 크지 않은 가게였고 다른 사람은 없었다. 두 사람은 바텐이자 사장인 남자에게 인사하고 전처럼 바 구석 자리에 앉는다. 전에도 마주 보고 앉는 것보다 나란히 앉는 것을 더 좋아했다, 루한이.
“난 차 가지고 왔잖아. 갈 때 운전해야지.”
잔을 권해도 들질 않아 쳐다보니 레이가 그렇게 대답했다. 루한이 그런 레이를 빤히 보다가 되물었다.
“한 잔 정도는 괜찮잖아.”
“……”
묻는 말이 아니었다. 레이는 잠깐 고민한다. 정말 한 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아서 자기 앞에 놓은 잔을 먼저 비운다. 루한이 옆에서 픽 웃었다.
그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짧고도 긴 이야기를 잘 지냈다던 루한이 먼저 늘어놓았다. 자신의 일에서부터 자신의 주변 사람들 이야기까지, 루한이 내내 웃으며 재잘댔다. 잘 지내지 못했다던 자신을 위해 어떻게든 분위기를 좋게 해보려는 노력인 걸 알아 레이도 덩달아 웃으려고 노력한다. 원래부터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먼저 마음이 식어 헤어지자고 한 자신에게도,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내가 더 잘 할 걸 그랬어요, 라고 했던.
“만나는 사람은 없어?”
“없으니까 우리 여기 있죠.”
“만났던 사람은.”
팝콘을 집어먹던 루한이 순간 말문과 표정을 잃는다. 화려하게 술병을 진열해놓은 정면 진열대를 멍하니 보다가 이내 눈 깜빡이며 대답한다.
“그냥. 여기저기 다니면서 몇 명 짧게 보고 그랬어요.”
오며가며 만나긴 했어도 제대로 만났던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내내 만나는 사람 없이 혼자 지냈던 레이는 그 대답에 머리를 비운다. 다행이라는 마음도 아니었고, 섭섭한 마음도 아니었고. 이 기분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저 이거 먹고 또 마실 거예요.”
옆에서 하는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다. 루한이 자기 앞의 잔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집에 데려다 주고 가요. 길에 버리지 말고.”
확답을 받은 후에 마음 놓고 비우겠다는 태도였다. 반쯤은 농담처럼 가벼운 그 말투에 레이가 피식 웃고야 만다. 고개를 끄덕이자 루한이 전에 못 보았던 모습으로 잔을 단숨에 비운다. 술이 늘었다더니 정말인 것 같다.
술에 취한 몸이 비틀거렸다. 루한의 등허리를 받치고 있던 레이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옆으로 쓰러지려는 걸 더욱 바짝 자신에게로 잡아당긴다. 묵직해진 몸이 힘없이 딸려왔다. 우리 다시 연락하고 지낼까요. 매달리러 왔다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던 레이에게 루한은 그 말 외엔 대답하지 않았다. 연락하고 지내다 보면 어떻게든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 같았고 레이는 어느 정도 동의했다. 루한의 오피스텔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곧 문이 열렸고 잠든 듯 기대있던 루한을 부축해 레이가 안에 들어선다.
“발 조심하고.”
바뀌지 않은 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연다. 문은 실없이 열렸다. 아까 왔을 때부터 현관 센서등이 켜지지 않고 있었다. 이번에도 역시 그랬고 레이는 정말 고장이 났구나, 한다. 현관문을 열어 복도 미등에 의지해 집 안 풍경을 본다. 루한의 발이 신발장을 차면서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가까스로 제대로 세운 뒤 레이가 구두를 벗겨주려고 허리를 숙이려 했다. 그런데 루한이 취하지 않은 사람처럼 레이의 손목을 붙잡아 잡아당겼다. 그림자 진 얼굴에도 그 눈빛만큼은 어설픈 불빛 덕분에 볼 수 있었다.
“늦었는데 자고 가요.”
취하지 않은 사람처럼 말을 하는 건지, 취하지 않은 건지.
레이에게서 대답이 없으니 루한이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는 레이의 손을 잡았다. 손에 깍지를 끼면서 루한이 다시 한 번 입을 뗐다.
“……자고 가요.”
“……”
“늦었잖아요.”
“……”
다시 고개를 든 루한은 아까 잘 지냈다고 말했던 것처럼 어설프게 웃고 있었다. 마치 나는 그래도 괜찮으니까, 그러고 싶으면 그렇게 해요, 라는 듯. 깍지 낀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손가락 마디가 아프게 얽힌다. 레이가 눈을 깜빡였다. 루한은 그 전에도 그러했던 것처럼, 넘칠 것 같은 눈이었다.
“……자고 가요.”
아니. 꼭 그러라는 듯.
레이가 손을 뻗어 문을 닫았고 시야가 어두워지자마자 입술이 부딪친다. 루한이 키스를 하다 말고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레이의 뒷목에 팔을 둘러 다시 입술을 찾았다. 그제야 레이는 깨닫는다.
이게 네 대답이구나.
씁쓸했다.
자고가라는 말이 이런 뜻도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키스를 하면서도 레이는 자꾸 미간을 찌푸렸다. 즐겁게 달려드는 루한이 당장은 버거웠다. 온 힘 다해 자기를 침대 쪽으로 당기고 밀쳐대니 집중하기가 어렵다. 먼저 침대에 닿은 레이가 앉은 채로 외투를 벗는다. 그 앞에 서서 루한도 코트를 벗는다. 루한의 손이 더 빨랐으니 먼저 비워진 손이 레이의 어깨를 쥔다. 뒤로 밀치는 바람에 어수선하게 침대 위에 눕는다. 루한이 무릎걸음으로 매트리스 위를 걸어 레이의 허리 위에 앉았다. 레이가 그런 루한의 허리춤을 두 손으로 잡는다. 맨 손에 만져지는 셔츠가 차가웠다.
키스를 하던 루한이 돌연 몸을 일으켰다. 레이의 스웨터를 벗기려고 밑에서 잡아당기다가 갑자기 그것 또한 멈춘다. 엉거주춤 허리 위에 앉은 듯 반쯤 서서는 입을 뗐다.
“나는 먼저, 내가 벗을래요.”
그리고 내가 벗겨줄게요.
꼬인 발음으로 말하더니 또 혼자 피실피실 웃는다. 루한이 천천히 자기 셔츠 단추를 위에서부터 풀면서 레이를 내려다본다. 다정하게 웃는 낯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그런 표정을 제대로 마주한다. 레이는 이쯤에서, 여기저기에서 짧게 보았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는다.
“……”
“……”
슬퍼지는 감정을 표정이 이길 수가 없으니 도저히 웃을 수가 없다. 레이는 무언가 체념한 얼굴이었다. 취한 루한은 그런 밑에 있는 얼굴을 모르는 채로 계속 웃었다.
느리게 셔츠 단추를 다 푼 루한이 그처럼 천천히 몸을 숙인다. 이건 당신이 벗겨달라는 듯 입술이 다가온다. 레이의 오른 손이 루한의 왼 뺨을 감쌌다. 무엇이 차갑고 무엇이 뜨거운지 분간키 어려웠다. 키스는 짧았고 루한이 다시 상체를 든다. 이번에는 제대로 레이의 웃옷을 벗길 생각이었다. 옷 밑자락을 쥐었을 때, 그런 루한의 손을 레이의 손이 잡는다. 정확히 말하면 손목이었다.
“……”
“……”
실수.
사실 잘 모르겠어. 우리가 지금 실수를 하고 있는데, 괜찮다는 네가 내일엔 괜찮지 않아지면 어떡하지.
자신은 이미 충분히 괜찮지 않으니 레이는 루한에 대해 생각한다. 너는 다정하고 강하고, 그래서 또 여린 사람이니까. 레이가 그런 생각으로 루한을 올려다본다. 예상과는 다르게 루한은 얌전히 손 안에 잡혀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로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나 싶었다.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울린다. 그 어느 때를 생각나게 한다. 다만 그 때는 자신의 집이었다. 하지만 그런 착각이 들었던 건,
“……울지 마.”
반년동안 우는 모습은 변하지 않았으니까. 눈물이 자꾸 난다. 루한이 쥐고 있던 걸 놓고 빈손으로 젖은 뺨을 닦고 눈물을 훔친다. 그런데도 눈물이 멈추지를 않는다. 울지 마. 레이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 동안 많이 울었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많이 울었고, 나중에는 조금 울었다. 그러다가 우는 일이 없어졌다. 많이 울었으니까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마치 그간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던 것처럼 눈물이 터진다. 머리가 지끈했다. 결국 울음이 터진 루한이 그대로 몸을 숙인다. 레이의 가슴 위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헤어지던 날과는 다르게 루한은 이제 와서야 그의 앞에서, 서럽게 운다.
나 정말 힘들었어요.
죽지 못해 사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나 진짜 지금도 너무 힘들어요.
전혀 잘 지내지 못했다.
노력조차도 안 했던 것 같다, 엄두가 안 나서.
아까 매달리러 왔다는 그를 보자마자 따져 묻고 싶었다. 나한테 왜 그랬어요.
……나한테 왜 이래요.
반 년 동안 내내 이별 중이었다. 헤어짐이 지독하게 길었다. 탈진하는 것 같았다. 황폐한 마음에, 그 모든 게 다 쓸려 가는데도 그 사람만 가질 않아서 죽고만 싶었던 밤이 많았다. 정작 당신은 증발하는데 내 마음이 껍데기만 뒤집어쓰고는 계속 남아서 나를 괴롭혔다. 나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힘들었어요.
그 동안 누굴 붙잡고 말하거나 울지 못했던 것이 이상하게 당사자 앞에서 터져 나온다. 억울하고 서러운 마음이었다. 루한은 오늘 헤어진 사람처럼 운다. 오랫동안 울 것 같다.
“……”
괜찮아, 울지 마.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레이는 단정한 정수리를 바라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을 생각하다가 곧 포기한다. 두 팔로 둥글게 말린 등을 힘주어 안아주려다가 대신 조심스럽게 감싸 안고 등을 토닥인다. 하고 싶은 모든 말을 대신해서.
Yixing worrying about his Lul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