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힙스터와 대여 한복을 입은 외국인이 오가는 서촌을 다녀온 뒤 시름시름 앓고 있다. 아버지가 갑자기 시간이 나게 됐다며 나들이를 가자고 해서 티베트 난민을 돕는 곳으로 유명한 소품샵 겸 식당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언젠가는 가보겠다며 인스타까지 팔로우했는데 결과부터 논하자면 무척 실망스러웠다. 어쩌면 계획이 틀어지면서 가을 나들이의 실패는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전날 또 갑자기 어머니가 늦은 오후에 동생 집으로 가 조카를 돌봐야 할 것 같다며 언제 귀가할 수 있을지를 종용했기 때문이다. 초행길, 관광객이 넘치는 동네, 여러 구경거리 등 변수가 많아 쫓기듯이 다니다가 일찍 올 바에는 차라리 다음에 가는 편이 낫겠다고 하니 뜬금없이 어머니가 화를 내더라. 내가 난감해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조카를 데리고 가자는 제안을 했다. 이때 무조건 안 간다고 발을 뺐어야 했건만 좋은 절충안이라 여겨 받아들이고 말았다.
조카를 데리고 가니까 당연히 자차를 탈 줄 알았는데 주차 문제가 있어서 지하철을 이용했다. 일리있는 이유다. 문제는 조카가 잘 걷기는 하지만 아직 유모차가 필요한 시기라 경량 유모차를 끌고 가야 했다는 사실이다. 그걸 누가 끌고 갈까. 당연히 나다. 끈다는 표현보다는 이고 다녔다는 말이 더 맞을 듯하다.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나라 대중교통이 약자에게 불친절하다 못해 잔인한 현실을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에스컬레이터, 계단에서는 아버지가 조카를 안고 어머니가 짐을 들고 내가 유모차를 이고 오르락내리락해야 했으며 지하철 문이 여닫히는 시간은 찰나와 같아 조카의 손을 잡고 탑승하던 아버지가 닫히는 문에 끼일 뻔했다. 아이 걸음이 느리지도 않았는데 뭐가 그리 급하다고 승객 안전 확인도 안 하고 문부터 닫아? 주변에 있던 승객들 전부 놀라서 소리질렀다. 하마터면 뉴스에 나올 뻔 했네. 지쳐서 엘리베이터 좀 타보려 했더니 관절 아끼려는 비장애인이 몰려 있어 정작 휠체어, 유모차는 들이댈 엄두도 못 내고 그러니 장애인 이동권 시위하는 거 아니냐 한국인들아! 걸을 만한 여력이 있는 사람들이 잠깐 편하자고 약자의 유일한 이동수단을 빼앗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할 나라가 약자를 사회 질서 어지럽히는 불순 세력으로 몰아가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니. 젊은 비장애인이 아동과 지하철 타기도 힘들 만큼 이 나라 지하철역 시설의 수준이 저급하기 짝이 없다.
첩첩난관을 넘으며 마침내 식당에 도착했는데 미처 예상치 못한 그림이 펼쳐져 있었다. 글쎄 유아용 의자가 없단다. 인스타에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고 동화책도 판매한다는 포스트가 있어 아이를 데려가도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막상 가서 보니 그리 아동 친화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 테이블 몇 개 없는 작은 식당이기는 해도 유아용 의자 하나 정도는 갖다 놔야 장사할 의지가 있어 보이지 않나. 메뉴도 적어 두부 커리와 새우 커리, 치킨 커리 외에 선택권이 없었다. 치킨 커리는 맵다길래 얼마 전 이를 뽑아 자극적인 음식은 못 드시는 아빠와 위가 약한 나는 두부 커리, 어머니는 그나마 아이가 먹기에 좋다는 새우 커리를 주문했다. '진짜 인도 커리' 임을 매우 강조한지라 나름 기대했는데 향신료를 데치기만 했나 싶을 정도로 둘 다 평범했다. 가족들이 딱히 음식을 가리지 않아서 인도인이 직접 운영하는 식당에서 향신료 팍팍 넣은 인도 음식도 싹싹 긁어먹는 터라 그 밍밍한 맛으로 진짜 인도 커리라 하니까 좀 우습더라. 처음에는 커리를 비빈 밥을 입에 넣은 채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던 조카도 거의 1인분을 먹었으니 그냥 현지화된 커리인 셈이다. 짜이도 확 치고 올라오는 강한 단맛이 없어서 쌍화차마냥 얼큰한 무언가일 뿐이었다. 인도인들이 짜이를 왜 마시나. 더우니까 수시로 당 보충해 에너지를 끌어올리려는 목적이다. 한국의 믹스커피같은 음료인데 믹스커피에서 설탕 빼면 맛없잖아. 짜이도 비슷한 원리란 말이다. 무의미한 짜이를 마신 뒤 소품샵을 구경했는데 물건이 적어 귀엽지만 진지한 작은 스님 인형만 사고 나왔다. 난민을 돕기 위한 곳이라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점은 이해하겠지만 유아용 의자처럼 기본적인 것부터 구비되어 있지 않고 요리와 음료 또한 무난해 여기도 청년층이 기분만 내기에 최적화된 장소들과 별 차이가 없는 느낌이라 적잖이 실망했다. 그래서 내가 요즘에 인스타를 안 본다. 인스타로 홍보하는 가게는 점점 불신하게 돼.
한국인은 식사 후에 카페인을 주입해야 뇌가 돌아가므로 적당한 루프탑 카페로 가 조카를 재우면서 힘이 빠진 어른들은 커피를 마시며 간신히 기운을 차렸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크리놀린을 연상케 하는 와이어로 치마를 부풀린 한복, 안에 겹친 옷이 적어 엉성한 포를 입은 외국인이 참 많았다. 불편한 한복을 입으며 사진 찍고 싶을 만큼 이 나라가 매력적인가. 그들 시선에는 깨끗하고 안전해서 관광하기 좋다던데 정작 현지인은 유모차 몰며 지하철 이용하기도 힘든 게 현실이니까 이민을 고려하거든 다른 아시아 국가 알아봐라. 아마 웬만한 아시아 국가들이 한국보다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배려심이 훨씬 깊을 거다. 번잡한 골목을 보고 있자니 집으로 갈 때는 어쩌나 싶어 까마득한 기분이 들었다. 잠이 덜 깬 조카를 유모차에 태우고 인사동을 가로질러 지하철역으로 향하는데 도로 중간에 박힌 거친 돌들 탓에 유모차 바퀴가 휘청대기 일쑤였다. 보행자 거리랍시고 만들었으면서 딱히 쓸모없는 돌을 박은 이유가 뭐냐. 차가 다닐 때 방지턱 역할을 하지도 못하게 생겼더라마는 순전히 멋인가. 나 혼자 인사동 구경할 때도 항상 그 돌이 신경쓰였는데 이제는 죄다 뽑아버리고 매끄러운 길로 만들고 싶네. 귀가한 조카는 새로운 경험도 잔뜩 하고 사람 구경도 하고 낯설지만 맛있는 음식도 먹어서 흥분한 상태였지만 사실상 유모차 셔틀이었던 나는 진이 빠져서 뭘 보고 들었던가 기억도 희미했다. 나들이 다녀오고 며칠이나 지났는데도 몸살 난 양 피곤하고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계절 바뀌며 축 처진 상태이기는 했지만 기운 내려고 나들이 갔다가 되려 병을 얻은 꼴이라 괜한 짓 한 것 같다. 다음에는 부모님이 어디를 가자고 한들 무조건 사절이다.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