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내와 난 쫓기고 있었다. 누가, 왜 우리를 쫓는지는 몰랐다. 그저 그들에게 잡히면 안 된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였고 언제 어느 곳에서나 우리를 지켜볼 수 있었다. 버스와 지하철을 몇 번이나 갈아탔을까. 포위망은 점점 좁혀 들어오고 있었고 더 이상은 빠져나갈 수 없어 보였다. 우리는 황급히 한 건물의 지하 술집으로 몸을 숨겼다. 자리를 잡고 앉아 그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려 보고 싶었으나, 굳이 바깥 상황을 확인하지 않고서도 그런 요행은 바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뭔가 좀 이상하다. 처음엔 지하 1층이 전부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 건물의 지하는 꽤나 넓고 복잡한 다층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렇게 잡히길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 아내의 손을 잡고 지하 2층, 3층으로 계속 내려갔다. 지하에 사람이 많았음에도 층을 내려갈 때마다 느껴지는 답답함의 크기는 배로 커졌다. 지하 4층 계단을 내려올 때가 되어서는 거의 숨도 쉬기 어려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우습게도 거기서 도서관을 발견했는데 문득 여기서 아내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중에 서로 전화로 장소를 정해 다시 만나기로 하고 큰 서가 앞에서 헤어졌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서가 안쪽으로 들어갔는데, 문득 그 안쪽에는 그들이 이미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대로 잡히는 건가. 그 순간 될 대로 돼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는 점점 무겁고 숨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답답한데 그들에게 잡히면 뭐 어떤가. 이쯤에서는 사실 왜 내가 쫓겨야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렇게 서가 안쪽에 서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검은 양복의 남자 앞에 섰다. 옅은 웃음을 머금고 있는 남자.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이 남자, 낯익은 얼굴인데. 그런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누구였더라. 아 그래. 생각났다. 그런데 저 사람이 왜 이곳에...
그렇게 잠이 깼다.
마지막 순간에 그 남자의 정체를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깨고 나니 여전히 누군지 알 수 없다.
2.
한동안 꿈이 기억나지 않아서 고통 받던 시간이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대부분의 꿈은 망각의 늪에서 건져 올리지 못한다. 그래도 요즘은 조금씩이나마 꿈에 대한 기억이 돌아오는 것 같아 다행. 무엇보다도 지인들이 꿈에 돌아가며 방문해 준다는 점이 매우 고무적이다. 김에 그간 뜸했던 사람들에게 연락할 구실도 생기고...
물론 노력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일어나자마자 TV나 휴대폰과 연결되는 순간 꿈은 다 흩어진다. 단편적인 장면이라도 끈덕지게 붙잡고 늘어져야 겨우 한 두 개의 꿈이 살아남는다.
3.
지난 2년 반의 육식 멀리하기는 얼마 전 그만두었다. 고기 없이 사는 게 힘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채식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나서는 자연스럽게 고기 냄새가 싫어졌는데, 심지어 고깃집에서 가면 벽에 베어 있는 냄새도 견디기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고기를 구울 때 나는 연기가 옷과 머리카락에 베면 그 모임 내내 신경이 쓰였으며 집에 돌아오자마자 얼른 샤워는 물론이고 입었던 옷을 세탁기에 집어던졌다.
그러다가 다시 고기를 먹게 된 것은 최근의 건강 상태 때문이었다. 올해 들어 갑자기 건강의 균형이 무너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몸무게도 갑자기 늘었고, 무엇보다 반복적인 경련이 찾아왔는데 이유를 알 수 없어 애를 먹었다. 알고 보니 근손실이 심해져서 그렇다고 한다. 탄수화물 위주의 식단이 이런 부작용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막상 마주하고 보니 더 이상 고기를 멀리할 명분을 잃었다. 처음엔 식물성 단백질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했으나, 고기를 대체하기에는 그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근손실을 막으려면 꾸준한 근력 운동이 필요했는데, 걷기 외의 다른 운동은 생각지도 않는 게으른 내가 빠져나가는 근육을 잡기란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먼 길을 돌아 다시 고기 앞에 섰으나, 여전히 순대나 곱창 같은 건 어렵다. 물론 앞으로도 굳이 찾아서 먹고 싶은 생각도 없고.
4.
일부러 그랬던 아닌데, 고기를 끊으면서 술과 커피도 그동안 입에 대지 않았다. 커피 멀리하기는 카페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생각으로 시작한 것이었으며, 술과는 원래도 친하지 않은 사이였으니 커피를 멀리하는 마당에 술이 웬 말이냐 싶어 딱 끊었다.
술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으나 사실 커피는 금단 현상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해 보니 그런 것 하나 없더라. 커피 같은 건 안 먹어도 아무 일도 안 생기더라는 얘기. 물론 담배도 마찬가지이지만, 커피는 현대인에게 약물이라기보다 습관이고 반복적인 경험이라는 면이 강한데, 그런 거야 맘 먹고 딱 끊어내면 불가능하지 않다. 무언가를 끊는 데에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런데 고기와 함께 커피도 다시 돌아왔다. 고기와는 달리 커피를 끊고 무슨 부작용이 생겨서 그런 것은 아니다. 커피 없는 일상으로 가는 데에 무슨 커다란 의미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 돌아오는 데에도 큰 결심이 필요하진 않았다. 생각보다 카페인 중독이라는 게 나에게는 심각한 일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것으로 충분하다. 다만 이전과는 다르게 믹스 커피는 안 먹으려고 한다. 먹어 봤는데 한마디로 맛이 없더라. 아이스아메리카노 또는 설탕을 넣지 않은 카페라테가 좋다.
얼마 전 합정 포비 베이직에서 먹었던 아이스 카페라테 맛이 아직도 생각난다. 처음엔 너무 진한 게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얼음이 녹으니 이렇게 맛있는 커피가 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났다. 다음에 가서 또 먹어야지.
5.
약을 안 먹고 자는 날은 대부분 새벽에 두어 번 잠이 깬다. 그래도 매일 약의 힘을 빌리고 싶진 않아서 이 달 들어서는 약 없이 도전해 보는 날이 많다. 하지만 그동안 꽤 좋은 흐름을 탔다 싶다가도 어젯밤처럼 아무런 예고 없이,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합리적인 이유도 없이 잠 못 드는 날은 찾아온다. 새벽 두 시에 약을 먹고 자기에는 너무 늦었고, 그 시각에 약을 먹고 잠에 들더라도 문제인 것이, 그 다음날은 오후 늦게까지 맑은 정신을 가지기 어렵다. 원래 지난주에 병원에 갔어야 했는데 정신없이 지나가 버렸다. 약이 조금 남아 있었던 데다가 요즘 약 없이도 잠에 드는 날이 늘어나면서 슬슬 병원에 안 가도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아직은 아닌가 보다. 병원에 전화해서 예약을 해야겠다. 약을 먹으면서 생기는 시력 감퇴나 현기증에서 언제쯤 졸업할 수 있을지...
6.
나중에 글로 옮겨야겠다고 맘먹은 것들 중 열의 아홉은 글이 되지 못한다. 메모장에 적혀 있는 ‘배운 도둑질과 걸레 아저씨’라는 글귀는 분명 내가 적어 놓은 것임에는 틀림없는데, 언제 적었는지, 어떤 내용이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어느 날 꿈을 꾸었겠지. 그때 바로 쓰지 않으면 이렇게 허망한 한 줄의 메모로만 남게 된다.
7.
2002년의 시간으로부터 벌써 20년이 흘렀다. 그때나 지금이나 지나간 시간은 쏜살같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는데, 그때와 달리 지금은 현재의 시간도 물처럼 흘러간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하루가 금방 지나가는지. 어제와 다를 것 하나 없는 오늘의 삶이 이렇게 의미 없이 둥둥 떠내려간다. 더 늦기 전에 뭐라도 새로운 걸 해 보고 싶은 마음과, 어쨌거나 때 되면 통장에 꽂히는 돈이 가져다 주는 일상의 힘이 팽팽하게 겨루고 있는데… 그나마도 이런 균형이 오래 가진 못할 거라는, 그리하여 어쩔 수 없는 결정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다.
8.
대선 이후로 마음의 평화를 위해 뉴스는 안 보려고, 그 중에서도 정치 관련 뉴스는 절대 안 보려고 노력 중이지만, 쉽지 않다. 통과해야 할 터널이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