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nstagram Project 콘스타그램 프로젝트
*할머니께서 돌아가신것을 계기로 미러두었던 가족사진 필름 약 110롤 이상을 스캔하기로 하였다. 스캐닝업체에 의뢰한다면 롤스캔은 해상도가 낮아 사진을 다시 사용하기 힘들테고, 고용량 스캔은 가격을 상상을 초월할테니, 사진을 전공했고 온 가족의 막내인 내가 직접 하는것이 좋을 것 같았다.
동시대에서 큰 화두가 되고 있는것은 아카이빙이다.
데이터와 정보가 너무 넘쳐나게 되자, 세상은 보존, 보관, 분류, 정리 등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간 데이터, 인포메이션, 컨텐츠를 ‘생산’하는 일에 사실 더 많은 초점이 맞춰져 왔다면
이제 그 데이터를 어떻게 유지, 보존하며 분류하여 아카이빙 (도서관화) 하느냐가 관건이 되었다.
하루에 2배의 데이터가 생산된다 하는데 모두가 필요한 정보일까? 대부분 쓰레기일 것이다. 당연히 그것들을 추리고 추려 또 다시 빅데이터로 분석을 하며 정보를 잘라내고 단순화 시키는 작업도 중요해졌다.
필름회사들이 필름 생산을 줄이고 중단하고 카메라 회사들도 필름 카메라 생산을 중단하며 현상액도 생산이 줄어가고 현상소들도 문을 닫아가고 있는 이 시점에,
물리적으로 끊김이 없는 아날로그인 필름을 이젠 활용하기 힘들여져 다른 형식의 데이터로 ‘아카이빙’을 한다. 포맷은 끊임없이 변한다. (사진은 그나마 양반이다. 영상의 포맷변회를 보라. 몇 년 단위로 바뀌어가고 변환이 힘들어진다.)
이 100여롤의 필름은 그저 한 가족의 초상이지만
아날로그-디지털 변환과 정리, 분류, 보존, 폐기를 하는 행위는 한 가족만의 초상은 아닐 것이다.
다행히 내가 사진을 전공했고 가지고 있던 필름장비 (라이트박스, 루페, 필름스캐너, 관련 컴퓨터 등)와 아직 필름촬영을 선호하는 취향 덕문에 과정이 어렵지는 않았다.
필름은 Instant하게 빛이 쬐여지지만 물리적으로 Constant하다. 하지만 그 물리성 역시 Constant하지만은 않다.
20~30년 된 필름들의 보존상태는 좋지 않았다. 중성지가 아닌 현상소의 필름속지와 온도와 습도가 고려되지 않았던 보관상태는 필름의 데이터가 많이 날아간 상태였다.
일단 이 필름들의 촬영부터 현상까지의 프로세스를 알지 못한다. 촬영 당시 카메라 렌즈나 암통에 먼지가 있었다든가, 현상 과정에서 실수를 했다든가, 필름을 커팅을 하며 스크래치가 생겼다든가 하는 것은 내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현상 이후에 있었던 것이라 추정되는 타격들은 인화메모로 인한 스크래치, 온도와 습도로 인한 변색, 먼지로 인한 노이즈 등이 보였다.
아날로그인 필름을 스캐너로 디지털 변환할 때 광량이나 데이터가 꽤 손실이 될 것이다만, 아날로그 물질인 필름이 시간이 더욱 지나며 절대적으로 산화되기 전에 스캔을 해 놓아야 이득아닌가.
작업은 이렇게 진행한다. 먼저 필름속지를 중성지로 바꾼다. 작업환경은 imac과 nikon coolscan Ved, VueScan Pro. 그간 에이조-윈도우와 니콘스캔 프로그램을 사용했던 것 과는 대조적이다. 하나씩 차근차근 필름의 종류에 따라 색정보값을 변경해가며 스캔을 뜬다. 원본파일이라는 TIFF 16비트로 스캔을 뜬 뒤, 노이즈나 스크래치, 그레인을 줄이며 색과 레벨 조정을 하고 사람들이 보기 편한 JPG압축 파일도 만드는 과정이다. 스캔을 뜨고 난 필름들은 년도와 날짜별로 정리해 필름전용 보관함에 분류한다. 디지털 파일역시 외장하드디스크에 년도별로 정리한다.
60~2000년 정도까지의 이 100여롤의 필름은 단순한 가족사진이다.이 사진들의 주인공은 ‘장명헌’, 즉 나의 아버지이다.
아버지께서 대부분 촬영을 하셨거나 피사체로써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60년대 국민학생부터 70년대 말 대학교 졸업식, 80년대에 어머니를 만나고 결혼식을 하시고, 신혼여행을 가시고 할머니의 회갑잔치와 형이 태어나고 내가 태어나고 90년대에 형이 학교에 입학하고 내가 학교에 입학하고 가족여행을 가고 따위의 상세한 가정사가 드러난다.
사진이 보편화 되기 전에는 족보나 구두로만 가정사를 알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와전, 왜곡되기도 한다. 물론, 사진역시 그 당시 모습만의 still cut이므로 정확하고 상세한 내러티브나 환경까지 설명해주기는 힘들다. 또한 촬영자의 기억역시 아무리 사진 앞이라 해도 왜곡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구두나 족보 따위의 인류학적 정보는 신뢰성과 정확성, 상세함이 사진보다 떨어지기 마련이다.
누가 어디서 태어났고 그 당시 옆에 누가 있었고 어디를 갔었고 따위가 사진이 없다면 정확히 기억 할 수 있겠는가.
재밌었던 건 60년대~2000년(대부분은 80~90년대), 100롤 이상의 필름을 스캔하며 여러 가지를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먼저 카메라의 변화. 60년대의 사진은 많지 않았다. 한국에서 카메라와 필름, 현상인화소의 보급상황을 볼 때 촬영하는 사람은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는 느낌. 피사체는 최대한 차려입었으나 사진촬영에 대해 익숙지 않은 약간은 경직된 표정 등이다.
80년대로 넘어오며 표정들이 조금씩 자연스러워진다. 사진 촬영에 익숙해진다는 점이다.
90년대로 들어오면 자동카메라들을 사용하게 된다. 오히려 사진의 질은 떨어지는 느낌이나 편리함과 자연스럽게 빨리 찍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점점 더 사진은 무엇을 ‘기념’하고 ‘축하’하며 ‘기억’하려는 일상적인 가족사진(still life)의 촬영의미가 확장되고 다양해짐을 의미한다.
70년대 말~80년대 초에는 한자와 단순히 필름과 현상소 광고 문구 등이었다.
“변치 않은 필름, 100년 보존 필름” 따위의 필름현상의 질과 보존성이 주를 이루었다.
80년대 중반 이후에는 “컴퓨터”를 많이 강조하는 게 돋보였다. 미츠비시 회사의 현상 프로세스를 내걸었던 현상소 속지에는 “컴퓨터”로 작업이 정밀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80년대 말부터는 현상 속도에 대한 언급이 가장 많았다.
“47분” 현상 완성, “45분 현상인화 증명사진”, “27분 현상” 그러다 90년대 들어서는 17분 까지 나왔다. 지금 세대는 디지털 카메라에 현상이라는 프로세스가 없기에(있긴 하지만 정말 순식간이다.) 17분현상이라는 말이 크게 와닿지 않겠지만 최초의 사진술을 발명했던 조셉 니엡스와 루이 다게르가 그 말을 들으면 까무러칠 일이다.
결국 현상소의 변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현상술 - 컴퓨터 - 현상 속도에 대한 얘기이다. (비단 이것은 현상소뿐이 아닐 것이다.)
사진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 큰 사회적 여파중 하나는 여성권리의 확장이었다고 한다.
여성은 사진이 발명되기 전까지 항상 ‘보여지는’ 쪽이었다.
물론 모든 여성은 아니지만, 일부 귀족과 부르주아 층 여성들 위주로 사진 촬영을 시작하여
어찌 보면 최초로 여성이 ‘보는 주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이 100여롤의 필름과 무관한 얘기이긴 하지만 어찌 보면 동시대도 비슷한 상황임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 처음 사진이 발명되었던 1800년대에 그간의 그림에서의 보여지는 피사체였던 여성이 카메라를 잡으며 보는 주체가 되었던 것이,
60~90년대의 주역 사진가는 남성이 많았다가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된 이후 , 이제는 남녀노소 누구나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은 또 다시 “보는 주체”가 된다.
하지만 여기서 새로운 시각의 변화는 “Self Camera”라 불리는 이 현상으로 여성은 보는 주체이자 보여지는 객체를 동시에 활용한다. 수많은 SNS를 통해 자신을 알릴 수 있게 되자, 카메라는 단순히 이제 “보는 주체” 역할이 아닌 “거울”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독일군이 1,2차 대전 때 광학기술에 투자를 그렇게 많이 한 것을 아는가? 그것은 “보는”것이 권력이기 때문이다. 전술카메라와 비행카메라 장비가 얼마나 독일군에게 많은 역할을 하였고 그 기술을 넘겨받은 일본역시 마찬가지로 그 힘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며 카메라는 쌍안경처럼 한방향 매체가 아니게 되었다.
카메라는 이제 거울 역할을 하며 양방향 매체가 되어, 카메라를 잡은 사람은 더 이상 주체만이 아닌 자아이며 타아, 배우이며 관객, 주체이며 객체가 되는 것이다.
예전에는 사진이 ‘기념’ 혹은 ‘기억’, ‘기록’의 역할로써 촬영부터 현상, 인화까지의 공정으로 존재했다면,
이제는 ‘대화’, ‘소통’, ‘공유’의 역할로써 존재한다.
곧, 필름이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활용도가 적어지며 쓰이지 않을 것이다.
비단 필름뿐이 아니라 LP나 영상 필름이나 음악 테이프도 마찬가지다.
LP는 몇 백번 틀면 음질이 나빠진다. VCR도 몇 백번 재생하면 화질이 엉망이 된다. 필름역시 현상과정도 복잡하고 변질된다.
디지털은 무한한 복제가 가능하고 보관이 용이하다. 아날로그는 복제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오히려 이점 때문에 가치가 다르다고 생각된다.
기술도 디지털 기술은 복제가 간단하다. 샤오미나 하웨이를 보아라.
광학기술 따위의 아날로그 기술은 복제가 쉽지 않다. 아사히-펜탁스의 광학기술을 탐냈던 호야는 단순히 안경 렌즈 기술 때문에 펜탁스를 인수해버렸다.
후지필름도 화학기술로 화장품 사업에 뛰어든 사례역시 유명하다.
LP나 음악테이프를 재생한다면 좋은 순간에 플레이를 할 것이고, 필름으로 사진이나 영상을 촬영한다 해도 필름을 아껴가며 촬영할 것이다.
무한함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영원한 꿈이었다. 비록 엄밀히 말해 디지털히 완전히 무한한것은 아니지만, 디지털의 무한성 덕분에 편하면서도 사람들이 느끼는 삶의 결핍은 바로 아날로그의 유한함인 것이다.
시간의 우연성 속에 찍힌 수 많은 가족사진은 하나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이 가족사진더미들 속에 이념적(혹은 기술적)조작성은 없다라 말 할 수 있겠지만, 기억의 조작성을 간과 할 수는 없다. 사진이 필름이나 디지털 파일이나 인화지로써 실존하고 있지만 사진 자체로써는 실존하지 못한다. 단순히 감광물질에 빛이 닿았다는 사실이다. 촬영하는 행위는 있지만 그 순간 전체를 아카이브 하지 못한다. 결국 이 필름더미들이 시사하는 바는 촬영의 기억이다. 보는 것의 기억이다. 역사가(나)에게 아카이브의 내용물은 과게에대한 객관적 상관물이나 원본을 만든 사람(아버지)에게는 자신의 시선과 기억하고 싶은 주관적 변용물이다.
역사가가 벌거벗은 네거티브를 포지티브화하며 아카이브에 다가가고 그는 자신을 본다. 그리고 어렴풋이 기억나는 자신의 어릴적 모습을 본다. 왜곡된 기억은 요식주의된 사진아카이브 앞에서 진동한다. 역사와 기록물은 대체로 주관적이기에 옳고 그름을 판별하기 어렵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분류하고 정리해서 만든 아카이브를 객관화시킨다. 아카이브란 기억의 모음에 다름아닐지 모른다. 기억은 표상이 되지 않는다. 곧, 아카이브는 실재계이다. 그리고 역사가인 내가 왜곡된 기억과 요식화된 사진을 아카이브 하면서 나는 실재계에 다가선다.
아카이브란 기억적 상관물의 일종으로 기능한다. ‘아카이브를 본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다시 관찰한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몇 백 시간을 들여서 필름 스캔을 하며 아카이빙을 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내가 자식들이 생긴다면 나의 기억과 기록을 이런 노력을 거치면서 아카이빙 해줄까.